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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백제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춘종 2018. 6. 4. 16:46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 들였다고 역사학자들은 가르치고 있으나

실제로 저의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신라는 백제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많은 피로가 쌓여 있었고 그리고 한강유역확보해서 당나라와 무역을 하길 원했습니다.

신라는 백제로 인해서 당나라와의 무역 활동에 여러가지 피로가 있었습니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당나라와의 무역활동을 하길 원했습니다.


당시에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서 당나라도 고구려도 많은 피로 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신라와 당나라는 어떠한 협약을 했을 수 있었습니다.

즉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만주일대를 차지하고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켜서 한강 유역까지의 영토를 확보하기로 협약을 맺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에 당나라와 신라가 이러한 협약이 없었다면 당나라는 신라와 나당연합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나라가 병신이 아닌이상 신라가 삼국통일해서 만주일대까지 진출하게 한다는 자체가 당나라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것입니다.


즉 신라는 백제의 땅을 얻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땅을 얻는 것이였습니다.


즉 신라는 삼국통일 이런 것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자왕은 나당연합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 했었던 것입니다.


백제의 멸망한 이후에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신라는 백제의 땅을 가졌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땅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에 당나라가 약속을 깨고 백제땅을 가지려 하자 백제유민과 신라가 같이 싸워서 당나라를 몰아 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당나라와 신라와의 협약이 깨지게 되었을때 고구려 만주일대에서 대조영이 다시 고구려 부흥을 위해서 당나라와 싸웠을때에 신라와 당나라와의 협약은 깨졌기 때문에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발해를 공격하지 않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즉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없이 고구려 부흥세력을 홀로 싸워야 했기 당나라 혼자서는 고구려 부흥세력을 감당해 내지 못했던 것이였습니다.


즉 신라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당나라를 끌여들여서 백제를 멸망시켰던 것이고

그것에 당위성을 얻기 위해서 결사 항전 하던 의자왕을 방탕한 왕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농후 합니다.


“의자왕의 최후는 항복 아닌 항전”     

공주 공산성서 목곽창고 원형발굴
공주 공산성 공북루 성벽 안 저수지 터에서 발견된 백제 갑옷(위 사진). 중국 당나라에 파견된 백제 관직명이 새겨진 이 갑옷은 백제가 항전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저수지에 수장시킨 의례용 갑옷으로 보인다. 음식 저장고로 추정되는 목곽고(아래 사진 왼쪽)와 거기서 발견된 유물과 씨앗들. 문화재청 제공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북루 성벽 바로 안쪽에서 거대한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8m가량 파고 들어간 흙구덩이에서 백제 옻칠 갑옷과 마갑(馬甲), 칼, 화살촉 등이 오랜 세월을 건너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1354년 전인 서기 660년 이곳은 10m 너비의 저수지였다. 당시는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쫓겨 수도 사비성을 버리고 공산성으로 피신해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였다. 이런 급박한 때 누가, 무슨 연유로 7세기 최고급 사치품인 옻칠 갑옷을 저수지에 빠뜨린 걸까.

문화재청과 공주대박물관이 23일 공개한 공산성 성안마을 발굴 유물들은 패망 직전 백제의 마지막 항전 장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수지 근처에서는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의 대형 목곽고(木槨庫)도 발견됐다. 부여 사비도성 등에서도 백제 목곽고가 발굴됐지만 이번처럼 원형이 그대로 유지된 건 처음이다. 목곽고에선 복숭아씨와 박씨, 무게 추, 칠기 등이 나왔다. 

수백 개의 화살촉이 저수지와 목곽고 모두에서 나왔고 주변 건물 잔해는 대부분 불에 탄 흔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고 기술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통설과 달리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삼국사기는 신라의 관점에서 쓰인 ‘승자의 역사’였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옻칠 갑옷 유물은 백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도(大刀)와 장식도(裝飾刀), 갑옷, 마갑 순으로 가지런히 놓인 채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가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의례를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3년 전에도 인근에서 비슷한 모양의 갑옷 유물이 발굴됐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발굴단장)은 “두 갑옷이 동시에 함께 쓰인 의례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고대 중국에서도 군대 출정 전 연못에 갑옷을 빠뜨리는 의례를 한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3년 전 발굴된 갑옷에는 당나라 연호인 ‘정관(貞觀) 19년’(서기 645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참軍事, ○作陪戎副, ○人二行左, 近趙○(참군사, ○작배융부, ○인이행좌, 근조○)’라고 적힌 파편이 추가로 발견됐다. 참군사나 배융부는 중국식 관직명으로 조공외교의 예에 따라 당나라에 파견한 백제의 외교사절을 지칭한 용어로 보인다. 이 관장은 “갑옷과 함께 묻힌 칼이나 깃대꽂이 등이 모두 백제산인 점과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먼저 발굴된 갑옷도 백제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40924/66665738/1#csidx2e5d4aac12edeb19cf3a9d8a30fc14d




출처 : 프리메이슨 연구모임(프.연.모)
글쓴이 : 루파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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