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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스차일드, 록펠러, jp모건, 쿤롭그룹등등 금융의 흐름

춘종 2015. 10. 7. 10:55


첨부파일 노무현대통령타살증거와 언딘정체.docx


로스차일드의 오른팔 록펠러는 어떤 인물인가!!!

 

 

 

로스챠일드 재산은 시대적배경과 사건사고 이익률로 볼때 33경정도 입니다.

메이어 암셸 바우어(Mayer Amschel Bauer)

일루미나티란 이름하에 그것이 세상에 나타났을때 이런 사탄적 음모는 1769년대에 시작된것입니다.

일루미나티는 아담 바이샤우프트(Adam Weishaupt)라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카톨릭 사제가 되기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한, 그후 그는 새로 조직된 로스 차일드 가문의 지령으로 변절해 일루미나티를 조직합니다. -로스차일드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두 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면 되시며 자신이 나서지 않고 모든 것이 이 두 기관으로부터 시작된 걸로 지금까지 속이고 있습니다일루미나티와,프리메이슨은 권력을 부리기 위한 명칭에 지나지 않습니다다시 말하면 일루미타티나 프리메이슨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로스차일드의 처음부터 기획된 조직에 불과 합니다-  밑에 열거한 기업총수는 모두 유태인 입니다. -세계최대의 은행들 모두 유태인 이상하죠?-

 

피라미드식의 계급구도

 

최상위 계급                          로스차일드

상위 계급         록펠러, 바티칸, jp모건, 쿤롭, 골드만삭스, 블라이흐뢰더 가등등

상위 기관   cfr,빌더버그,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삼변회, 미국, frb, ibrd, imf, fema, irs, fbi, cia, 모사드, Mi5,국제사법재판소,nasa

중위 기관                      일반은행,세계최대 식량기업 100%, 방산기업 100%, 미국상위기업 40%등등

하위                                                 그외 모든것     

 

frb는 사기업이고 주주가 로스차일드(뒤에모든것이 로스차일드의 대리인),록펠러(체이스은행),jp모건(모건스텐리,퍼스트내셔널은행),골드만삭스,모스즈시프(이스라엘),왈버그(네덜란드금융 뉴욕내셔널상업은행),쿤롭(시티그룹),하노버은행,등등 11~12개 자본이며 모두 유대자본이거나 록펠러등을 앞세운 대리인 입니다.

모두 짜인 스토리입니다매트릭스 처럼요....

우리가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것입니다.

 

 

록펠러의 성공신화: 록펠러는 중.소 규모의 석유개발업체 사장이었습니다.

록펠러는 원대한 꿈을 꾸고 로스차일드를 찾아가게 됩니다.

모든 석유회사를 합병하고 싶습니다자금을 지원해 주십시오.

자금을 지원해주실 경우 독점체제 이므로 저에겐 가격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로스차일드 백작님에겐 안전한 이자수익이 보장되게 됩니다.

로스차일드의 지원하에 지금의 록펠러 그룹이 생겼으며 너무나 거대하여 정부에서는 분할을

명령합니다지금의 세계10대 메이저 정유사들이 대부분 록펠러그룹에서 분사한 똑같은 그룹입니다회사는 분할됐지만 대리인을 내세운 지분율로 기존의 회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3년 록펠러의 자산은 1경 3000조라는 천문학적인 미국에서 가장잘나가는 대리인이 됩니다.  (ibrd, imf, frb주주)

 

철도왕 밴더빌트: 록펠러와 똑같은 경로로 성공합니다.

골드만삭스: 마르쿠스 골드만은 로스챠일드의 지원으로 철도채권을 어루만지며 거대한 성장가도를 달린다.

 (ibrd, imf, frb주주)

 

GE: 에디슨 기업으로 알려져있죠나중에 투자자인 jp모건에게 회사를 뺏기게됩니다.

지금도 jp모건의 자회사로 되어있습니다.

 

 

jp모건의 성공신화미국에서 성공한 상인이 로스차일드를 찾아갑니다.

로스차일드는 유대인 상인인 피버디를 국제금융가로 키워줍니다.

그는 자식이 없었으며 직원인 존피어폰트 모건에게 재산을 상속하게 됩니다.

피버디 금융그룹을 이어받은 모건은 사명을 jp모건으로 변경하며 미국에서 은행업으로

커다란 성공을 하게 됩니다.(ibrd, imf, frb주주)

 

아브라함 쿤 쿤롭그룹: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이며 로스차일드의 그림자같은 존재이다. (ibrd, imf, frb주주)

 

같이보기

 

로스차일드 가문(House of Rothschild) 
로스차일드의 제국은 마이어 암셸 바우어(Mayer Amschel Bauer, 프랑크푸르트에서 1743년 출생)가 독일의 빌헬름 9세 당시 황태자가 미국 독립전쟁 참전 영국 병사들의 군수물자를 착복한 자금을 횡령하여 건설한 것이다. 
바우어(후일 로스차일드로 이름을 바꾸었다)의 아들 네이선은 런던에 회사를 세우고 로스차일드 은행(N. M. Rothschild and Sons)을 설립했고 이어 파리, 빈, 베를린, 나폴리에도 지점이 생겼다. 네이선의 아들 라이오넬(Lionel)을 거쳐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는 잉글랜드 은행의 행장이 되었고, 1885년에는 하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원탁 회의의 회원이기도 했다. 당시(1886-87년) 재무 장관 랜돌프 처칠(Randolph Churchill,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원을 받았고 나타니엘 로스차일드(Nathaniel Rothschild)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밖에도 로스차일드 가에는 유명한 사람이 많이 있다. 
빅터 로스차일드 경(Lord Victor Rothschild)은 KGB 스파이 조직의 "제 5의 인물"이라고 알려졌는데, 윈스턴 처칠 총리의 명령으로 "18b 규정(Regulation 18b)"에 따라 단순히 "의심스러운" 사람은 무조건 체포하고 수감할 수 있도록 했다.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내각에서는 정책 보좌관(1970-74)을 맡았고, 유럽 통합 운동에서 여러 가지 음모 작전을 수행한 비밀 조직을 이끌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또한 BBC의 사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에드먼드 드 로스차일드 남작(Baron Edmund de Rothschild)는 "부채 탕감법(debt for equity)"을 고안하여 제 3세계 국가들이 채무 이행을 위해 "환경적으로 위험한" 토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도록 한 장본인이다. 
에블린 드 로스차일드(Evelyn de Rothschild)는 현재 영국 지사(N. M.Rothschild)의 회장이며 홀링거 그룹(Hollinger Group) 소유의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 지의 이사를 맡고 있다. 




관련 기업/가족 
1800년대 후반부터 쿤롭 기업(Kuhn, Loeb and Co.)은 북미에서 수많은 기업을 사실상 지배해왔으나, 자신들이 지배하는 기업의 이름에는 "City"나 "First City"와 같은 이름을 넣어 지배 구조를 숨기고 있다. 밴쿠퍼 퍼스트시티 금융(First City Financial Corporation of Vancouver), 퍼스트시티 개발(Fist City Development Ltd.) 등이 대표적인 회사이다. 
이러한 기업의 운영은 로스차일드의 뉴욕 지부(Rothschild Inc.)와 홀링거 그룹과 깊은 관계가 있는 캐나다의 파워콥(PowerCorp)이 대부분을 주도한다. 
모건 제국(Morgan Empire)의 설립에서도 로스차일드 가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모건은 런던의 조지 피버디 주식회사(George Peabody and Co)를 모태로 1864년 설립되었고 피버디 사후 J. S. 모건 주식회사(J. S. Morgan and Co)로 이름이 바뀌었다. 피버디는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이었다고 한다. J. S 모건의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현재의 J. P. 모건(J. P. Morgan)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모건 제국에는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 모건 개런티 트러스트, 전미상업은행(National Bank of Commerce)등이 포함된다. 
로스차일드 가는 워버그 가문(Warburg Family)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폴 워버그와 펠릭스 워버그는 현재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FRB) 체제를 확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형제인 맥스 워버그는 독일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록펠러 제국(Rockefeller Empire) (로스챠일드로인해 모든석유그룹 인수합병) 
1853년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설립한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이 록펠러 제국의 기초를 이루었다. (현재는 분사한 엑손(Exxon)과 에쏘(Esso)가 더 잘 알려져 있다.) 록펠러 가문은 정치적으로도 공공연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J. D 록펠러 3세는 1952년 인구위원회(Population Council)를 설립했으며, 미국 인구성장률을 0으로 유지하는 운동을 후원해 왔다. 이 운동은 1972년 로렌스 록펠러(CFR, Bil, TC의 회원)가 닉슨 전 대통령에 의해 인구 증가에 관련된 국가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국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물러나고 포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넬슨 앨드리치 록펠러가 부통령이 되었다(1974-77). 넬슨은 CFR 회원이자 UN 창설 당시 미국 대표단이기도 했다. 
데이빗 록펠러는 체이스맨해턴 은행(Chase Manhattan Bank)의 행장이었으며, 1946년부터 53년까지 CFR 회장을 맡았다. 또 빌더베르크 그룹의 상임 위원이자 삼자위원회의 창설자로도 알려져 있다. 
퍼시 록펠러는 모건 개런티 트러스트의 이사이며 해골과 뼈 클럽 회원이었다. 
록펠러 가문은 국제연맹 창설 당시 자금을 지원했으며 뉴욕에 소유하고 있던 대지를 국제연합 본부에 기증했다. 




관련 기업/가족 
록펠러 가문의 통제권 아래 있는 기업으로는 체이스맨해턴 은행, 스탠더드 오일(엑소, 에쏘), 내셔널시티 은행(National City Bank), 하노버 국립은행(Hannover National Bank), 전미 트러스트 주식 회사(United States Trust Company), 뉴욕 생명 상호보험(Equitable Life and Mutual in New York) 등이 있다. 
록펠러 가문의 사촌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미 국무성에 근무했던 덜레스 형제(Dulles Brothers)가 있다. 이들은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했으며, RIIA/CFR과 관계를 맺었고, 미국, 영국, 독일의 은행들과도 친분을 가졌다.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우수 인종" 개념을 지지했고 히틀러의 지지자이기도 했는데, 미국 국무장관의 자리까지 올랐고, 같은 시기에 동생 앨런은 CIA 국장으로 일했다. 




헨리 키신저(Dr. Henry Kissinger) 
CFR, TC의 회원, 빌더베르크 그룹의 지도자이며 키신저 사업단(Kissinger Associates)을 캐링턴 경과 함께 이끌고 있다. 헨리 키신저는 RIIA, 체이스맨하탄 은행, 록펠러 재단 등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홀링거 그룹의 국제 고문이다. 닉슨 행정부에서는 국무장관 및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았다.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을 촉발시킨 각종 사건에서 외교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집트, 시리아,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욤키푸르 전쟁(Yom Kippur War)의 발발에도 영향을 주었으나 오히려 197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키신저는 스위스의 프리메이슨 알파인 로지(Alpine Freemason Lodge)의 회원이었고(현재 상태는 미확인) P2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로스챠일드 가문 http://blog.naver.com/ena0242/220214145906





 

예전 미국은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시위대의 확산으로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

 

시위대 중에서 깨어 있는 사람들은 단순한 일자리만을 요구하는게 아니라,,,미국 중앙은행 즉 FRB(연방준비은행)을 국유화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하면은,,,미국 중앙은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 정부기관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국제금융재벌들의 사금융기관이라는 얘기입니다. 즉 미국 국민을 위한 국가 기관이 아니라 소수 개인들을 위한 회사입니다.

 

사실상 모든 세계 경제 문제의 핵심적인 원인은 달러 발행총국이자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FRB)이 민간 소유 법인이라는 것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누구 소유라고 들어가면,,,연방준비은행(FRB)의 주인 즉 최대주주가 록펠러,모건,로스차일드,골드만삭스 등 국제금융재벌들 인 것입니다... 지배자는 로스차일드

 

버냉키 FRB 총재가 시위대의 주장에 공감한다며 미국 경제 불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으로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는데요,,,정말 웃기더라구요,,,^^

 

아무튼,,,EBS에서 연방준비행이 민간소유 법인이다라는 이런 부분을 잘 아주 간단하게 잘 정리해서 방송을 했는데 그 URL과 화면 몇개를 올립니다(동영상 캡쳐를 못해서 무식하게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당 ㅎㅎ)

 

▶EBS 방송보기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ommand=vod&client_id=jisike&menu_seq=1&enc_seq=3089082&out_cp=ebs


EBS 방송 캡쳐 - 연방준비은행(FRB)의 최대주주들



EBS 방송 캡쳐 - 연방준비은행(FRB)의 최대주주들

뉴욕 내셔널시티은행(록펠러와 쿤롭사 소유)



EBS 방송 캡쳐 - 연방준비은행(FRB)의 최대주주들

퍼스트내셔널은행(JP 모건 가문 소유)



EBS 방송 캡쳐 - 연방준비은행(FRB)의 최대주주들

뉴욕 내셔널 상업은행(폴 와버그 소유)



EBS 방송 캡쳐 - 연방준비은행(FRB)의 최대주주들

하노버은행(로스차일드 가문 소유)



EBS 방송 캡쳐 - 연방준비은행(FRB)의 최대주주들

미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은 정부기관이 아닌 민간 소유의 법인

 



참고자료

달러 - 엘런H. 브라운

달러의 비밀 - 크레이그 카민

화폐전쟁 - 쑹훙빙

달러제국의 몰락 - 배리 아이켄그린

 

출처: 지식채널 EBS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ommand=vod&client_id=jisike&menu_seq=1&enc_seq=3089082&out_cp=ebs

 


미국 중앙은행 격인 FRB는 민간은행이다 !

영국중앙은행도 민간은행이다 !

한국은행은, 정부가 만든 정부-중앙은행이다 !

 

미국-영국의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인데, 그 민간은행의 대략 50%는 유대인이 소유-지배한다 !

이게 결론입니다~


EBS 다큐프라임 VOD 보기 : http://www.ebs.co.kr/replay/show?prodId=348&lectId=3121167

 

NASA는 미국 공공기관이 아님..FRB같이 비밀주주들

 

미국 전화부 책을 보면, FRB는 정부란에는 없고, 개인 기업란에 있다 !  분명히 FRB는 민간/사기업이라는 말이다 !

 

위의 말을 한, 로스차일드는 유대인이다 !

그와 그의 가문은, 영국은행의 최대 주주이기도하고, 월스트리트의 FRB도 숨은 지배자이기도 하다 !

 

1970년대(금본위제를 포기한 시기) 실질적인 미국의 지배자였던 유대인이자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런 말을 했다 !

" 미국이 계속 세계를 지배할려면,  군사력, 석유 그리고 달러 발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고~ ㅋㅋ

 

유튜브에서 동영상 무료로 다운받는 방법

1.https://www.youtube.com/watch?v=1_0li7LByTM&list=PLzShdirG2PT1pz3JfZuv7-LsKpp94urHj

2.https://www.ssyoutube.com/watch?v=1_0li7LByTM&list=PLzShdirG2PT1pz3JfZuv7-LsKpp94urHj

1번이 주소입니다. 2번처럼 유튜브앞에 ss를 추가하면 어떤것이든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다운로드 창이 나오면 다운하세요~

 

frb는 사기업이고 주주가 로스차일드(뒤에모든것이 로스차일드의 대리인),록펠러(체이스은행),jp모건(모건스텐리,퍼스트내셔널은행),골드만삭스,모스즈시프(이스라엘),왈버그(네덜란드금융 뉴욕내셔널상업은행),쿤롭(시티그룹),하노버은행,등등 11~12개 자본이며 모두 유대자본이거나 록펠러등을 앞세운 대리인 입니다.

ps) cia의 모든것, 장문입니다 -pdf파일포함-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304322


ps 자료에는 5시간동안 인코딩한 동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911의 진실, 제약의 위험성, 에이즈는 사기다, 인류말살 프로젝트, 우리가 먹는 유전자조작 음식물 있습니다.

세계경제와 세계금융인물들분석 금융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루미나티가 있다는 쑨훙빙의 주장,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겠지요?


지금의 시대에서 성인남자가 돈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돈이란 자신의 한 인격과 가치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은 실감하며 살 것이다.


매달 밀려오는 청구서와, 고용주 밑에서 재미없는 일을 하며 월급을 받지만, 통장의 잔고는 쌓여가지 않는다.


이 시대에 우리는 자본을 여자처럼 사랑한다.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에도 혹은 그런 마음을 움직일 시간을 사는데에도 최소한의 자본은 필요하다.


대학시절 맘에 들던 아가씨와 소개팅을 할 기회가 생겼지만, 거절했다.

참으로 단순한 이유였으니, 그 지역까지 갈 장거리 버스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은 파산중이었고, 1년동안 받은 용돈은 3만원이었다. 쓰기도 싫었고 한동안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었다.

난 대학생이었고, 최소한의 장학금과 알바, 주말엔 노가다를 뛰면서 월40~60의 벌이로 생활을 간신히 유지했다. 잠은 하루 여섯시간 이상 자기힘들었고, 집이란 잠만자는 곳이었고, 나름 그래도 바닥에서 순수한 노력을 하며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누릴수 있는 행복감을 누리면서 살던 것은 사실이었다.

주말에 고층아파트 호이스트를 오르내리며, 쏘나기가 내리는 동안 비를 맞고 수많은 포대를 쓰레기화물칸에 던져넣었다.

금달에 방세와 이것저것 공제하고 쓸 잔여금이 7만원 정도 남아있었고, 소개팅보다는 금달에 있을 토익시험비와 1주간의 식거리와, 1만 5천원은 일에대한 스스로의 보상으로 후배하고 닭갈비를 뜯고 소주를 마시는 쪽으로 결정했고, 잔돈 몇천원이 남아, 슈퍼에서  5개묶음 특가 빵과 콜라 1.5리터를 할인코너에서 2천원에 주고사서, 주 5일의 도서관 점심끼니를 하루 4백원의 자본으로 해결할수 있었다.

그 당시 소개팅을 거절하고 토익비에 이체시켜 본 토익시험 점수가, 입사지원에 필요한 토익점수에 최소한 커트라인을 넘겨서, 난 취직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일했었고, 그 말은 때때로 무리하게 장학금을 위한 수업조건과 아르바이트를 빠지지 않기 위해 50시간을 아예 잠을 자지 않고 보낸적이 있던 것만큼은 최선이었기에, 그것이 최선의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은 말할수도 있다. 난 남자를 볼 때 돈이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여성들이라도,

그 최소한의 여건은 직장과 집, 차, 정도의 수단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요건을 포함하게 된다. 소개팅이 있을때 만나러 갈 차비 정도도 없다면 어쩔수도 없다.


사실 난 돈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지만, 한편으론 돈의 부족이 얼마나 사람을 치사하고 기회들을 빼앗는 것인지를 알았기에, 그렇기에 돈을 모으고자 하는 의식과 그런 기회들의 소중함에는 각별함을 느끼고 살았으며, 쏘나기를 맞고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일해도 자본시스템의 하위구조속에서 일하는 것이, 상대적 보상이 불평등할정도로 적다는 것을 느끼며 살았기에 이 시대에 효율성있게 자본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 관심사를 두게 되었다.


자본이 없는 남자에게 세계의 미래는 회색빛의 장막처럼 모든 걸 가리우며 펼쳐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런 장막들을 좀 걷어내고 싶다. 한 때 난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가 진홍빛 베헤리트를 들고 모든걸 바치고 구하는 마음으로, 돈 자체를 벌 궁리에 수 많은 탐색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자본주의시대의 기득권자들과 부자들은, 이런 투자거래를 적극활용하여 책상위에서 돈다발을 벌어들이고 그들이 영웅처럼 대접받고, 그런 성공을 인정하는 사회적 기조속에 살면서도, 오히려 서민스스로가 돈의 레버리지를 이용해서 효율성있게 돈을 벌라고 하는 것에 대해, 서민들이 특히 더 무관심하고, 스스로는  그런 기회들에 대해 도박이나 겜블처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그와 관련된 노력을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자나 은행이 대출이자나 서면계약 조건등을 통해 자본시스템을 활용하여 돈을 버는 것은 부러워하지만, 자신이나 자기 주변의 같은 서민이, 투자를 통해 돈을 벌려고 하면 노름꾼이나 투기자쯤으로 보는 것이다.


각설하고, 두 편의 영화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관한 상반된 시각을 다룬다.

거대자본회사가 파산할 지경이 되어, 국가가 공황에 빠질가능성이 있는 쯔음, 미국 정부가 1200억달러 (120조원 )의 세금을 10대 은행에 무상으로 지원한 것이 합법적인가? 비합법적인가?? 를 다루는 내용들이다.

그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 헨리폴슨의 결정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영화 마진콜의 내용과도 비슷하지만, 투 빅 투 페일에선 이런 헨리폴슨의 결정을 불가피하고 영웅스런 결정이었고, 어찌할 수 없는 필요악속의 최선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등장인물들과 영화속의 등장인물들이 무척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작은 기업들이라면 국가가 관여하지 않는것이 합법적인데, 

말 그대로 이들 초거대 기업들이 망하면 국가자체가 흔들릴 정도가 되어, 어쩔수 없이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미국의 인구가 4억임을 감안할때, 1인당 3백달러의 세금을 이들 10개 은행에 바친 것이다.

헨리 폴슨은 몰랐다, 자신이 파국의 주범이 될 줄은


하지만 또 다른 영화 마이클 무어의 시각은 이런 정책에 대한 부자들의 이익과 서민들에 대한 불평등한 부분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선 먼나라 불구경의 체감하기 힘든일이겠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에서 ?겨날 서민들이 6천만명에 달한다고 하니, 미국내에서 그 수준은 심각한 것이다. 

그리고 헨리폴슨이 1200억달러의 자금을 지원한 10개의 투자은행들은 직원들을 정리해고 하지만, 하나같이 경영진들의 성과급은 오히려 올랐으며, 이렇게 국민이 세금을 바친 돈으로 무상수혈을 받은 기업들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 부도나지 않은 덕분에 더욱 박차를 가해서 직원들이 죽을때 회사에서 거액의 보상을받는 보험을 몰래 들거나, 미국에서 7초에 한 집씩 세입자들을 퇴거시키는 데에 그 힘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정부의 구제금융은 소수의 부자들을 망하지 않고, 더욱 부자로 만들었을뿐, 서민들에겐 그들이 대출을 할수 있는 은행이 문을 닫지 않게 한 것 뿐일뿐, 어떤 특혜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무어는 처음에 보여준다. 미국이란 나라가 오드리 햅번의 시대엔 서민모두가 부자들이었지만, 추후 막대한 돈을 버는 금융가들의 더한 욕심에 차차 그들을 위한 정책과 규제쪽으로 변화되어, 빈익빈 부익부가 된 오늘날의 미국을...


예전의 미국은 서민들도 편안히 베란다에서 와인잔을 홀짝이며, 클래식 기타를 튕기며 여여한 행복을 생각할수 있었지만,

진료할때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내야하는 병원과 서브프라임사태에 휘말린 수백만의 서민들은, 집에서 ?겨나지 않기위해 공권력과 치열한 투쟁을하며 살아간다.

서민들은 벼랑끝에 몰려 집에서 ?겨나면 갈 곳이 없고, 이런 현상이 수백만명에 달하는 있는 현상인데도 은행들은 그저 계약상의 조건을 채우지 못해, 사람들을 내?고, 그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려고 Sale간판을 내걸지만, 그렇게 ?겨난 사람들만 많을뿐 아무도 그것을 살 사람들이 없어 흉가처럼 방치되고 있는 것이고, 결국 그런 기업마저 다시 부도가 나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도 좋을게 없는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벌주기 위해서 압류하는 현실이 되고 만다.

다큐에선 차라리 서민들이 반기를 들고 혁명을 일으키기를 바라며, 실제로 공권력과 법을 동원해 강제퇴거를 시키려는 인부와 경찰들을 막는 민중집회가 선으로 보여지게 된다.

법이 선한 취지와 당위성을 잃고, 이익이 사라지게 될때, 그 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고,

때때로 위법하는 것이 하나의 혁명이 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사회주의자로 몰아 낙선시키려던 민중파인 오바마가 결국 대통령이 되었고, 오바마 시대에 미국은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자신들이 만든 법을 서민들이 적극적으로 집을 점거하여 어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로 소수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불합리한 법을 어기는 것이 헌법위의 헌법 권리장전의 뜻에 부합한, 인간 기본의 권리가 더욱 초법적인 상위가치로 두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이 다큐내내 월가의 사람들과 그 당시 재무부 당사자들은 마이클무어가 찾아가면 성가신 역병을 마주친냥 피한다.

부시대통령조차 대놓고 비판하며 서민들의 지지를 등에업은 그를 경비원들이나 경찰조차 어찌 못하는 듯하다.


전자의 영화 투빅투페일에서 전직 골드만 C.E.O였던 헨리폴슨 재무장관이 골드만의 경쟁사였던 리먼은 단호히 정책지원을 하지 않고, 부도시키고 그 여파로 골드만이 연쇄 부도의 위험에 처했을때 적극적으로 다른 기업들과 싸잡아 1200억 달러의 자본을 수혈한 것에 대해서, 타이밍이 그럴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것으로 보여주고 있으나, (고로 이 영화에서 부도난 리먼의 회장은, 자신의 회사가 부도나고 다른 은행들이 부도날 위기에 처했을때, 헨리폴슨이 정책을 바꿔 정부구제쪽으로 바꾸게 되자, 술을 마시면서 "저런 개새끼"라고 한마디 하게 되는 것이다.)


후자의 영화 마이클무어의 시각에선 헨리폴슨은 중립에 있어야할 고위관료임에도 불구하고, 팔이 안으로 굽듯 골드만 삭스의 정부지배속에 누구는 파멸시키고, 누구는 구제하는 ~ 꼭둑각시에 의해 조종되는 하나의 장기말로 비춰질 뿐인 것이다.


소재 자체가 매우 재밌기도 하거니와,

두 편의 작품을 연달아보면.. 한 사건에도 그 시각에 따라서 어떤 의미로 재구성될수 있고, 어떻게 대조적으로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무척 흥미롭게 바라 볼 수 있다.  

두 작품은 한 사건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통해, 서로 시너지효과적인 재미를 더욱 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다큐의 내용에 대해서는 월스트리트 10부작 시리즈가 있다.(2편에 영화에 관한 부분이 상세하게 나와 스크랩)

자본주의 시대, 부자와 서민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돈을 버는 방법의 차이로 양분된다.

부자들은 돈을 활용한 레버리지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낳은 새로운 기회들에 대해 항상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찾고 끊임없이 공부해가지만, 서민은 언제나 계약서 싸인과 고용조건에 따른 월급을 받는 일에 대해서만 신경쓰고, 그것을 전제로 자신의 삶의 모든것을 구축하려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돈을 바라보는 철학이, 지금 당장의 부를 결정짓지는 않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오픈하는가? 클로즈하는가 정도의 차이를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화폐전쟁

은행가문중 로스차일드 가문이라고있다. 재산이 알려진것만 으로따지면 5경 5천조원정도된단다. 그 가문은 나폴레옹전쟁때 말도안되는 부를 축적했고, 그걸로 보이지않게 유럽의 각나라의 국채등을사서 중앙은행의 화폐발행권을 얻어냈다. 영국의 중앙은행의 지분역시 로스차일드가문이 가장많다. 신대륙인 미국역시 로스차일드가문의 손에 들어갔다. 여기서 손에 들어갔다는건 로스차일드가 뭐 군주가?느니 그런게아니다. 로스차일드은행 가문이 미국의 화폐발행권을 얻어내고 미연방준비은행의 대주주가 된걸말한다. (미국은 현재도 1달러를 만들때마다 로스차일드가문에게 1달러의 빚과 몇%의 빚을짐) 로스차일드가문이 미국의 화폐발행권을 얻어내는 과정을 보면 가관이다. 남북전쟁당시 링컨은 이런말을 했다고한다. "내 눈앞의 적보다 내 뒤의 적이 더 두렵다." 로스차일드은행은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에게 전쟁자금을 주겠다고했다. 링컨은 거절하고, 스스로 화폐를만들어낸다. 그뒤 의회에서도 링컨보고 민영은행을 설립해 화폐를발행해야한다고 했지만 링컨은 거절했고, 남북전쟁이끝나자마자 죽는다. 그리고 링컨이 죽자마자 미국에는 민영중앙은행이 세워진다. 그외에도 미국의 여러 대통령들은 민영중앙은행을 없에고 화폐발행권을 국가스스로 하려고 시도했고, 몇몇 대통령은 성공했지만 이게 우연인지 그걸 시도했던 대통령들은 대부분 다 저격을 당한다. 그렇게 현재까지도 미국의 민영중앙은행은 미연방준비은행이란 이름으로 민간은행이 계속 화폐를발행하고있고 미국의 빚은 미국을 팔아도 갚지못할정도다. 월가의 모건,록펠러같은 거물들역시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항간에는 록펠러는 왕, 로스차일드는 황제라는 말까지 떠돌았다. 여튼 월가는 로스차일드가문과 대화함에따라 IMF라는 기구를 만든다. 미국은 은행업자들의 압박때문에 가입하게되고, 그외 수많은 국가들이 가입함으로 국제기구가된다. 어느날 아시아의 부자국가가 되버린 태국에 헛소문이돌면서 투자자들이 대거의 국체가 팔았다. 그러면서 태국은 IMF의 도움을 받게되고 회생을하지만 말이 회생이지 나라안의 은행이나 기업들이 거의다 팔렸고, 중앙은행의 지분역시 팔렸다. 일본역시 국민의 2/3가 백만장자일때가있었다. 그러나 태국?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서 국가는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역시 IMF가 도와준다. 일본역시 태국처럼당했다.(버블경제) 한국역시 위의 태국,일본과 같은 사태가 일어났다. 그?또 IMF가 구제금융을 해준다고했고, 구제해주는대신 뭔가를 해달라고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한국기업의 외국인지분율을 수십퍼센트 올려달라는것외에도 말도안되는 조항들이 많았는데, 한국은 금모으기운동등으로 사태를 벗어났다.


로스차일드의 후계자

알랙상드르 드 로쉴드 이사
"글로벌 경제 재구성 끝나면 아시아 자본 역할 강해질 것" 국민연금·삼성생명과 만나

모두 사진보고 저주해 주세요~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빙(宋鴻兵)은 "세계 최대의 부자 가문은 '로스차일드가(家)"라고 했다. 독일계 유태인 가문인 로스차일드<사진>는 지난 250여년간 8대(代)에 걸쳐 전 세계 금융자본을 지배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이 슈로더, 영란은행 등을 사실상 통제하고, 미국의 월가는 물론 심지어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조종한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의 소유 기업은 대부분 비상장이라 이들의 재산이 얼마인지가 '추정 불능'이다. 쑹훙빙은 그의 책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50조달러(약 5경원)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 로스차일드 가문의 적통 후계자인 알랙상드르 드 로쉴드(Rothschild·프랑스식 발음·33) 로스차일드 그룹 이사가 최근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비공개로 찾았다. 그는 로스차일드 그룹 데이비드 로쉴드 회장의 장남으로, 운용 총괄을 맡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장남의 가문 승계' 등을 통해 가문이 가진 힘의 분산을 차단하기로도 유명하다.

4일 서울의 숙소에서 만난 그는 "최근 글로벌 경제는 재구성되고 있는데, 이 과정이 끝나게 되면 글로벌 시장에서 아시아 기관들의 역할이 눈에 띄게 강해질 것"이라며 "현재 우리는 아시아 10개국에서 재무 전문가 100여명을 채용해 직접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방한 기간에 국민연금공단, 우정사업본부 등 기관투자자들과 삼성생명, 전략적 제휴사인 삼성증권 등 기업 관계자들도 만났다. 업계 관계자는 "로스차일드 그룹은 투자 자문 외에 펀드 운용도 하고 있는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아시아 자본'을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로스차일드 그룹은 운영 자산 30억유로(약 4조3000억원)를 갖고 주로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상업은행 부문, 40개국에 전문가 900여명을 두고 지난 5년간 M&A(인수·합병) 1100건을 해낸 글로벌 재무 자문 부문, 90개국 VIP 고객 4000여명을 상대로 하는 자산 관리 및 신탁 부문, 그리고 글로벌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산 운용 부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로쉴드 이사는 이어 "1년에 서너 번 아시아를 찾았는데, 한국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첫 방문에서 한국인들의 도덕성, 공경심 같은 사회 핵심 가치관이 발전의 기반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특히 오랜 경험을 가진 구세대를 만나면서 이런 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오전 9시 만남이었는데, 이미 첫 번째 미팅을 마친 상황이었다.

그는 이어 "한국은 전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면서 "한국은 점점 세계화되고 있는 데다 다양한 기관(국민연금 등)들이 막대한 자본을 보유하고 있어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로스차일드 가문
250년 前 고물상에서 시작해 세계 금융자본 쥐락펴락

250년 전 독일의 유대인 거주지(게토)에서 고물상과 동전 장사로 시작한 가족기업 집단이었다. 당시 가게에 내건 휘장이 '붉은 방패(독일식 발음 로트칠드)'였고, 그것이 로스차일드란 이름의 기원이다. 본격적으로 융성해진 것은 18세기 후반 다섯 형제가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로 퍼져 각국에서 은행업을 벌이면서부터다.

이들은 발 빠른 정보 교류를 통해 세계 금융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1998년 IMF 구제금융 때 한라그룹, 현대투신 등의 정상화에 관여하면서 한국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 가문이 만들어 낸 '샤또 무통 로쉴드' 등의 와인 역시 최고급 와인으로 유명하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는
 현재 미국내 12개 연방중앙은행의 통괄기관으로 워싱턴에 위치해 있으며, 
 1918년에 제정된 연방준비법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처음에는 연방준비국
 이라고 불렀지만 35년 은행법으로 연방 준비제도이사회로 개칭되었습니다.

 이 FRB의 주요 역할은  화폐발행.지폐 발권은행으로서 달러를 발행하고,
 재할인율등 금리결정,재무부 채권매입과 발행,지급준비율 결정등을 
 하며  이를 위해서 연 8회 연방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개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앙은행이 미국 정부에 소속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국제금융재벌이 소유한 개인사설 은행입니다.
 미국은 현재 이 FRB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빌려쓰고 있는 채무국이며,
 미국 정부에는 달러에 대한 화폐발행 권한이 아예 없습니다.

 따라서 달러가 필요할 경우에는 국민이 납부할 미래의 세금(국채)을 
 연방준비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그것을 기준으로  달러를 발행하게 됩니다.
 화폐는 크게 채무화폐와 비채무화폐의 두 종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채무화폐는 현재 주요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달러처럼 실제로는.. 
 종이에 불과하여 자체적인 가치가 없는 것을 정부 법률 또는 명령에 의해 
 화폐로 확정히여 통용하는 것으로 채무를 담보로 발행되는 화폐입니다.

 비채무화폐는 금은등 그 자체로 실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을 화폐로서
 유통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재산과 소유를 나타냅니다.때문에 특정국가
 등에서 만든 규약이나 법률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세계에서 통용되고,
 채무화폐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채무화폐인, 달러가 발행되었다는 것은  채무가 발생하였다는
 말입니다.즉 중앙은행이 조폐국에서 인쇄한 지폐를 제작 원가에 사들이면,
 정부는 FRB로 부터 발행된 달러를 액면가(지폐제작 원가가 아닌)로 빌리고
 빌린 원금은 빚으로 남으며, 천문학적이 이자까지 복리로 내어야 합니다.   
 
 미국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그 이자를 충당하고 있고, 이자수입은 다름 
 아닌 달러를 만들어내는 은행의 몫이며 채무원금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적자금 투입(연준이 정부에 빌려주는 돈)이나 유동성을 시중에 
 직접 푸는 정책등은 이런 국가의 FRB 부채를 확대키는 정책이 됩니다..

 FRB에 대한 주요 내용들을 아래에 정리해 보았습니다.대략의 내용을 
 읽어 보시고 미국 달러와 중앙은행에 대해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아래 관련 중요한 책자들도 함께 소개해 놓았으니 꼭 읽어 보십시요.
 로스차일드,록펠러를 비롯한 세계 금융자본이 전쟁과 돈으로 전세계를 
 지배해온 오랜 역사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실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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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한국 기사 출처: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
기사 원제: 미국 정치와 경제 좌지우지하는 금권 통치기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지구상에서 통용되는 미화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 중앙은행의 공식 명칭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FRB: Board of Governors of Federal Reserve System)’이다. 우리나라가 조폐창을 통해 원화 지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FRB의 존재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면 미국 정부에 예속된 공기관 성격의 은행이 아닌 개인 사설 은행이다. 제3세계의 약소국의 중앙은행도 아니고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FRB. 세계의 경찰이라 불리는 초유일 강대국 미국은 아이러니 하게도 FRB로부터 돈을 빌려쓰고 있는 채무국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FRB는 국제금융재벌이 운영하는 개인 소유 은행이지만 형식적으로 FRB 의장을 지명하는 권한은 미국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FRB가 사유 재산임을 직시하면 미국 정부가 그 경영인을 임의로 바꿀 권한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 대통령이 FRB 의장을 지명하는 것은 겉치레일뿐 실상 신임 FRB 의장의 선임 권한은 FRB 내부 이사회를 통해 결정된다. 미국 대통령은 거저 짜여져 있는 절차에 따라 공식적인 발표를 대신해주는 대변인, 즉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FRB 설립 원치 않았다




1913년 미국 정부가 FRB 설립을 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용인하기까지는 설립을 막기 위한 역대 정치인들의 노력과 설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은행가들의 암투로 얼룩져 있다. FRB를 설립한 금융자본은 겉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인 J.P모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유럽의 금융재벌들이 80%에 가까운 지분을 나눠 독점하고 있다.

 FRB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유럽의 금융재벌들은 영국은행, 프랑스은행을 통합한 유럽연합(EU)의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소유주이기도 하다. FRB는 바로 유럽의 거대한 국제금융재벌이 장악한 사설 금융기업이다. 

미국이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막대한 유럽의 사설 금융자본재벌은 미국 경제권을 사유화하기 위해 부단한 로비와 정치인들을 매수하는 금권 조직을 총동원해왔다. 경제의 중점이라 할 수 있는 은행은 선(先)침투 대상이었다.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정부의 권한에 맞먹는 사설 중앙은행 설립을 시도했다. 

그 연대기를 살펴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다분히 음모적이고, 처절할 정도로 집요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일부는 유럽의 거대 금융자본조직의 유혹을 뿌리치고, 개인이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끈질기게 싸웠다. 

최초의 미국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킨 미국 독립의 선각자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4대), 앤드류 잭슨(7대), 아브라함 링컨(16대), 존.F.케네디(35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총알 한방 쏘지 않고 사설 중앙은행을 설립해 미국을 송두리째 삼키려 하는 거대 금융자본조직의 모든 불합리한 수단과 방법을 물거품으로 만들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앞장섰다. 따라서 이 문제에 개입한 미국 대통령들은 항상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고, 대부분 비극적인 종말을 맞아야 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음에도 이들 미국 대통령들이 개인 소유의 사설 중앙은행이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갖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는 동일했다. 

1832년 제7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당시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관장했던 사설 중앙은행이었던 ‘미국 제2은행’에 대해 “우리 정부의 이익금이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8백만 이상의 은행 주식을 외국인(유럽 금융자본조직)이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것이어야 할 은행의 구조가 오히려 우리의 자유와 독립성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회의 돈을 관리하면서 우리 국민의 자주성을 ‘외국인이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적에게 막강한 군사력이 있는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골고루 적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부자나 가난한자를 공평하게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현 정부는 그런 자격이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 경제와 국권이 달린 화폐 발행처인 중앙은행이 개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극구 막으려 했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노력은 막강한 부를 이용해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총동원한 국제금융재벌조직에 의해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금융자본을 원천적으로 소유하려 했던 국제금융재벌조직은 독립전쟁 중 군수물자로 거부(巨富)가 된 R. 모리스(현 J.P모건의 창업자)를 내세워 1781년 ‘북미은행(The Bank of North America)’을 설립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북미은행이 무너지자 재차 제1미국은행(1790년)-제2미국은행(1816년)을 다시 설립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벌였다. 

이러한 미국 정부와의 반대에 부딪히는 과정을 거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한 결과, 1913년에 연방준비지급법안이 의회를 통과되면서 마침내 미국 화폐를 발행하는 사설 중앙은행인 FRB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는 곧 미국 정부와 화폐발행권을 둘러싸고 벌인 팽팽한 줄다리기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했다. 

FRB는 금권 통치를 기나긴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듯 사설 중앙은행 설립을 반대했던 프랭클린, 제퍼슨, 매디슨, 잭슨, 링컨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을 전리품처럼 미국 달러 지폐에 새겨 넣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통화발행권을 쥔 FRB에게 돈을 빌어다 쓰고 갚아야 하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1년에 1조 달러였던 미국의 빚은 18년만인 1998년 말경 6조 달러로 늘어났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 천문학적 빚을 갚기 위해 FRB의 눈치를 살피며 오히려 지배당하고 있는 처지다. 


1907년 대공황과 FRB 탄생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5년 10월 24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올해 1월 말로 임기를 마감한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왼쪽)이 참석한 가운데 새 FRB의장에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의 지명을 발표하고 있다.

190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890년에 제정된 ‘셔먼독점금지법’을 부활시켰다. 셔먼독점금지법은 뉴욕을 중심으로 전미지역에 경제독점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J.P모건을 견제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법은 1890년 7월에 제정된 미국 최초의 독점금지법으로 미국 내 주 단위 및 외국과의 금융거래와 상업의 독점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시 루즈벨트는 이 법으로 유럽에서 J.P모건으로 유입되는 M.A로스차일드 금융재벌의 자본을 차단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 내 금융자본이 유럽의 거대금융자본조직과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을 상대로 반격에 나선 J.P모건은 미국 정부를 속이고 고의적으로 대공황을 유도했고, J.P모건과 M.A 로스차일드 그룹은 이 사건을 발단으로 미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 다시금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밑 작업을 암암리에 벌여 나갔다. 

당시 미국의 소규모 은행들은 과다한 대출로 지급준비금의 1%도 안 되는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고객이 1백 달러를 은행에 맡겼을 때 1달러 정도만 되돌려 줄 능력이 없었다. 이같은 상황을 악용해 거대 은행 J.P모건은 미국 내 대부분의 은행들이 파산직전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여론은 J.P모건의 생각대로 적중해 은행에 돈을 맡긴 민간이 자금을 회수하려는 시도가 빗발쳤고 결국 시중의 일반은행들은 일제히 도산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때 J.P모건이 나서 금융권의 안정화를 위한 중앙은행 설립을 주창했다. 정치권과 학계, 언론을 매수해 동조하는 여론을 형성했다. 그 결과 1907년 미 의회는 경제 공황의 원인 조사를 위해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ly Commission)’라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 위원회는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2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앙은행 등을 대상으로 운영방식과 소유 지분에 대한 벤치마킹에 들어갔다. 이들 유럽의 중앙은행들은 이미 M.A로스차일드 금융재벌이 몇몇 개인 금융재벌과 손잡고 소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올드리치 의원은 이를 본뜬 사설 중앙은행 설립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M.A로스차일드 금융조직의 지시를 받던 J.P모건이 이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FRB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올드리치’ 법안은 사설 중앙은행에 대해 최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연방정부의 직속 기관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명칭이 ‘연방지급준비금법안’으로 변경돼 의회에 상정됐다. 

FRB 조직은 미전역을 보스턴, 필라델피아, 뉴욕, 클리블랜드, 리치먼드, 애틀랜타,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댈러스, 샌프란시스코 등 12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FRB 본점에는 이를 대표할 7명의 이사진을 선출해 여기서 추대된 대표 회장 1명에게 관리책임을 맡겼다. 

FRB 본점에 있는 7명의 이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에서 인준하도록 되어 있다. 임기는 14년이고, 일단 임명된 이사와 대표회장은 어느 누구도 해고할 수 없다. 새 이사의 임명 터울은 2년이다. 


연방 정부의 감사도 받지 않는 FRB

FRB의 위력을 전 세계적으로 실감하게 만들었던 전임 FRB의장 앨런 그린스펀. 

세상은 한때 그를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렀다. 그의 말 한마디에 뉴욕 월스트리트는 물론 전 세계 증권가가 요동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 달러의 통화량을 마음대로 조절할권한을 가진 그는 그야말로 세계 금융시장의 황제였으며, 세계의 초유일 강대국 미국 대통령도 간섭할 수 없는 전 세계의 경제대통령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FRB 의장의 힘이 이 정도로 비대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1920~1931년까지 미 하원 금융통화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루이스 맥파든 의원은 “국제 금융가와 국제 산업가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세계를 노예화시키는 ‘초(超)국가가 바로 FRB”라며 맹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 그는 FRB의 소유주가 ‘국제 금융가’라는 점을 주지시키며 그들이 미국인이 아닌 유럽인이라고 폭로했다. 

또 1960년대 하원 금융통화위원회 의원장을 지낸 라이트 패트먼 의원 역시 “오늘날 미국에는 사실상 2대의 정부가 존재한다. 하나는 헌법상 정식으로 만들어진 정부이고, 또 하나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누구와도 협조하지 않는 독립적인 정부이다. 그 정부는 바로 의회가 헌법에 따라 관리해야 할 미국의 화폐를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세력을 휘두르는 연방지급준비제도이사회(FRB)”라고 말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정부는 지금도 FRB를 감사할 권한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FRB가 한해 소모하는 예산과 지출이 얼마이며, 어디에 사용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미 의회에서 끊임없이 감사의 칼을 들이대려 할 때마다 FRB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로비와 법적 수단을 동원해 이를 막아왔다. 

이 같이 막대한 금권을 이용해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그 중심에 FRB가 있다. 오랜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금융자본조직은 존재하지않았다. FRB 지하금고에는 막대한 량의 금괴들이 쌓여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국의 달러를 금덩어리와 동일한 가치라고 신봉하게 만들어 놓고 유통시키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미국의 지폐는 자신들이 찍어내는 것이기에 쌓아둘 공간조차 아까운 한낱 종이에 불과한 것이다. 

FRB뿐만 아니라 EU의 유럽중앙은행(ECB)를 소유하고 세계를 움직이는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하는 국제금융자본조직. 그 정체를 파헤친 수십, 수백 권에 달하는 역사서와 기록들 속에는 그들의 출발이 환전꾼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 미루어 FRB의 실제 주인은 미국 태생의 3대 금융가(家)인 록펠러, 골드만삭스, 레먼을 포함해 유럽의 국제금융그룹인 M.A 로스차일드, 와벅, 라자드, 쿤룹, 시프 등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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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를 원가에 사들여서는 이자까지 붙여 정부에 빌려준다!! 


지폐를 원가에 사들여서는 이자까지 붙여 정부에 빌려준다!! 사립 은행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할 때 발생하는 폐해는 특정 세력이 경제를 멋대로 좌우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 밖에 좀 
더 커다란 문제가 있다.

'불량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 독립국들의 중앙은행은 통화발행권을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특권에 따라 중앙은행은 국가의 조폐국이 인쇄한 지폐를 제작 원가나 다름없는 가격에 사들인다. 그러면 정부는 중앙은행으로부터 액면가에 그 지폐를 빌린다. 

그리고 그 결과 이자 지급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다.역사 속에서 사리사욕에 불타는 자본가들과 양심 있는 정치가들은통화 발행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미국에서도 건국 이래 8차례에 걸쳐 통화 발행권이 양자 사이를 오갔는데, 현재는 자본가들이 1913년이래 단물을 빨고 있다. 이 통화 발행권이야말로 금융 자본가들이 그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
이고 강력한 수단인 것이다.

독립한 나라의 통화 발행 권리를 역사상 가장 처음 획득한 곳은1694년에 시작된 영국은행이다. 그리고 이 영국은행도 결국은 유럽의주요 국가의 중앙은행과 마찬가지로 로스차일드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만다. 지금은 구미뿐만 아니라 선진국, 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전 세계의 모든 독립 국가의 중앙은행이 그들의 지배를 받고있다 - p.170


로스차일드 "내게 국가의 통화 공급 통제권을 달라"


이 통화 발행권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유럽의 모든 중앙은행을
지배하는 계기를 만든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Mayer Amschel Rothschild(1744 ~ 1812) 다. 

그는 자신의 다섯 아들을 프랑크푸르트와 런던,파리,빈,나폴리에 보내 그곳에서 중앙은행을 만들게 함으로써 로스차일드 번영의 기초를 만든 인물이다. 이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내게 통화 공급권을 통제할수 있는 권한을 달라.그러면 누가 법률을 만들든 상관없다." 
영국은행을 통해 이 특권의 달콤함을 깨달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인것이다. - p.172


소득세를 징수하는 국세청(IRS)은 헌법위반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은행이 통화 발행권을 쥐고 있다.
정부는 돈이 필요하면 연방준비은행에서 빌리게 되며, 때마다 이자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미국 정부는 조폐국에서 인쇄된 모든 지폐에 대해 이자를 내야 할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재의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되었을 당시(1913년), 정부가 내야하는 이자가 거액이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문에 금융 자본가들은 그때문에 금융 자본가들은 
당시 정부를 끌어들여 국민의 세금으로 이자를 충당하도록 제도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이전에 대법원에서 헌법 위헌으로 판결 내렸던 '소득세 징수'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고 이 소득세 징수를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국세청-IRS인 것이다.
국세청도 연방준비은행과 같은 해인 1913년에 설립되었다. - p.183

 

오늘날까지도 미연방준비은행이 사실 민영 중앙은행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이른바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FRB)'이란 '연방'도 없고, '준비금'도 없으며
'은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대부분은 당연히 미국 정부가 달러를 발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에는 화폐발행 권한이 아예 없다. 1963년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로 미국 정부는 그나마 남아있던 '은 달러'의 발행 권한마저 빼앗겨 버렸다. 미국 정부는 달러가 필요할 경우 국민이 납부할 미래의 세수(국채)를 민영은행인 연방준비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연방준비은행권'을 발행하게 한다. 이것이 곧 '달러'다. - p.100

높은 가격을 매기려면, 연방준비은행은 금리를 인하해 신용을 확대하고 활황 증시를 만들기만 하면 된다. 상공업자들이 그런 식의 금리 환경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연방준비은행이 제멋대로 금리를 인상해 활황을 멈추게 할 것이다.

연방준비은행과 이를 소유한 은행가들은 가벼운 금리 조작을 통해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처럼 시장가격이 조금씩 기복을 보이게 할 수 있으며, 금리 변동을 크게 함으로써 시장 가격 파동을 가져올 수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그들은 금융 상황의 내부 정보를 확보했기 때문에 장차 일어날 변화를 사전에 다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정부도 이런 특권을 준 적이 없었다. 소수 특권 계층만 갖는 가장 기이하고도 위험한 시장 정보의 선점이었다.이 시스템은 민간 소유이며, 출범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돈을 이용해 최대의 이윤을 얻는 데 있다.

그들은 언제 경제공황을 촉발해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할지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언제 경제위기를 끝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금융을 장악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은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최고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찰스 린드버그. 하원의원 

유통되는 연방준비은행권 1달러는 연방준비은행에 1달러의 빚을 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통화보고서>, 은행 및 통화위원회

절대 다수의 미국인은 국제 금융재벌이 대출을 해주는 구체적 방식을 알지 못한다. 연방준비은행의 계좌는 단 한 번도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그 계좌는 완전히 의회의 통제권 밖에서 움직이며, 미국의 신용공급을 조종하고 있다.-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상원의원

당신이나 나나 수표를 쓰기 위해서는 계좌에 수표 지급을 위한 충분한 금액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방준비은행이 수표를 쓸 때는 계좌에 돈이 전혀 없다. 그들이 수표를 쓸 때는 화폐를 발행한다.-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연방준비은행 지역은행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독립된 민간 소유이며, 지방이 통제하는 회사다.
-루이스(Lewis)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건의 제9순회법정의 판결 사례, 1982년

연방준비은행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기관이다. 내가 들어본 의회연설 중에서 우리 국가가 사실상 국제 금융재벌들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연방준비은행이 미국 정부의 기관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민간 신용대출 독점기관이다. 연방준비은행은 자신과 외국 사기꾼의 이익을 위해 미국 국민을 착취하고 있다.-맥패든(McFadden), 하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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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지킬 섬 : 미연방준비은행의 발원지
 
1910년 11월 22일 밤, 한 대의 기차가 뉴욕 근교로부터 남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중 한 칸은 완전히 밀폐되었고, 모든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칸에 타나 사람들은 모두 미국의 중요한 은행가들이었으며, 그들 중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차의 종점은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는 조지아 주의 지킬 섬이었다.

조지아 주 지킬 섬은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겨울철 휴양지로 즐겨 찾는 곳이다. J.P. 모건을 위시한 경제계 거물들이 지킬 섬에 사냥 클럽을 세웠는데, 지구상 6분의 1의 부가 이 클럽 회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회원권은 양도가 안 되고 계승만 가능하다. 어느 날 클럽 측은 누군가 이 클럽을 2주간 사용할 텐데, 그 기간에는 어떤 회원도 출입을 금지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클럽의 모든 직원은 대륙에서 선발해 오며, 이곳에 도착하는 손님에게는 이름만 부르는 것이 허용되고 성을 호칭할 수 없었다. 클럽 주변 80킬로미터 반경에 대한 기자들의 출입도 통제했다.
모든 준비가 진행되고 손님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 비밀회의의 참석자 중에는 다음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넬슨 올드리치(Nelson Aldrich)-상원의원, 국가화폐위원회 의장, 넬슨 록펠러의 외조부
 
A. 피아트 앤드루(A. Piatt Andrew)-미국 재무부차관보
 
프랭크 밴더리프(Frank Vanderlip)-뉴욕 내셔널시티은행장
 
헨리 P. 데이비슨(Henry P. Davison)-JP모건 사장
 
찰스 D. 노턴(Charles D. Norton)-뉴욕 퍼스트내셔널은행장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JP. 모건의 오른팔
 
폴 와버그(Paul Warburg)-독일 유대계 이민자, 1901년 미국에 옴, 큰롭 사(Kuhn Loeb and Company)사장,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과 프랑스 대리인, 미연방준비은행의 총 설계사, 미연방준비은행의 1대 이사

 

이렇게 쟁쟁한 거물들이 그저 사냥이나 하겠다고 작은 외딴섬까지 행차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중요한 문건인 ‘연방준비은행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폴 와버그는 전문가답게 은행 업무의 세세한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각종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일일이 대답해줄 뿐 아니라, 자세한 역사적 내력까지 막힘없이 설명해주었다. 모두가 은행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고개를 숙였다. 폴은 자연스럽게 문건의 주요 기안자이자 해설자가 되었다.

넬슨 올드리치는 참석자 중 유일하게 금융의 비전문가였다. 그는 문건 내용이 정치적 요구에 정확히 들어맞아 의회에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책임을 맡았다. 다른 사람들은 각 은행 그룹의 이익을 대표했다. 이들은 폴이 제기한 방안을 두고 아흐레 동안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의견 일치를 보였다.

1907년의 은행위기 이후 미국인의 눈에 비친 은행가들의 이미지는 형편없었다. 은행가가 제정에 참여한 법안을 감히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의원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부득이 뉴욕에서 외딴섬까지 가서 문건의 초안을 작성하기로 한 것이다. 초안에서는 중앙은행이라는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제퍼슨 대통령 시절부터 중앙은행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국제 금융재벌과 비밀리에 결탁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에 폴은 ‘연방준비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러나 명칭에 상관없이 새로운 문건으로 탄생하는 은행은 중앙은행의 직능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연방준비시스템도 잉글랜드은행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보유한 주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거액의 이익을 창출할 것이다. 앞선 두 중앙은행과 미연방준비시스템의 차이점이 있다면, 주식 가운데 원래 20%를 차지하던 정부 지분이 없어지고 ‘순수’한 민영 중앙은행으로 거듭났다는 점이다.

연방준비은행에 힘을 실어주고자 폴은 이를 관장하는 문제에서 교묘한 방안을 제시했다.
 “의회가 미연방준비은행을 통제하고, 정부는 이사회 대표 자격을 가진다. 그러나 이사회의 다수 구성원은 은행협회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나중에 폴은 마지막 제안 부분을 “이사회 구성원은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다.”라고 정정했다.

그러나 이사회의 진정한 기능은 ‘연방자문위원회’가 관장하며, 연방자문위원회와 이사회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토론’한다. 연방자문위원회의 구성원은 연방준비은행의 이사 12명이 결정하는데, 이 점은 의식적으로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폴이 직면한 또 하나의 난제는 뉴욕 은행가들이 연방준비은행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숨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이래 미국 중서부의 중소 상인과 농장주들은 금융위기의 쓴맛을 톡톡히 본 터라 동부 출신 은행가들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의원들은 은행가들이 주도하는 중앙은행을 지지할 수 없었다. 

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개의 연방준비은행 지점으로 전체 시스템을 구성한다는 기발한 해결 방안을 설계했다. 금융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 화폐와 신용대출이 뉴욕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각 지역에 미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한다는 것은 중앙은행의 업무가 뉴욕에 집중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데 불과하다.

폴의 선견지명은 미연방준비은행 본부를 빈번하게 지령을 주고받는 금융 수도 뉴욕이 아니라 거기서 멀리 떨어진 정치 수도 워싱턴에 두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럼으로써 뉴욕 은행재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다소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의 또 다른 고민은 연방준비은행의 12개 산하 지역은행의 관리자를 선출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넬슨 올드리치가 의회에서 쌓은 경험을 십분 발휘했다. 그는 중서부의 의원들이 뉴욕 은행가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통제가 잘 안 되는 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지역은행의 이사는 의회에서 간여하지 않고 반드시 대통령이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법적으로 큰 모순이 있었다. 헌법 제1장 제8절에 의회가 화폐의 발행과 관리를 담당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회를 배제하면 미연방준비은행이 처음부터 헌법을 위반한다는 허점을 보이게 된다. 과연 이 문제는 나중에 의원들이 미연방준비은행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렇게 많은 준비 끝에 이 법안은 엄연히 미국 헌법의 분권과 상호 견제를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출현했다.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가 심의하며 독립 인사를 이사로 임명하고 은행가가 고문이 되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설계였다.


월가의 7인 : 연방준비은행의 막후 추진자

 
월가의 7인은 현재 미국 대부분의 인프라산업과 자원을 관장하고 있다. 그 중 J.P. 모건, 제임스 힐(James Hill), 조지 F. 베이커(Gorge F. Baker, 뉴욕 퍼스트내셔널은행장)는 모건 그룹에 속해 있다. 

나머지 네 사람은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윌리엄 록펠러(William Rockefeller), 제임스 스틸먼(James Stillman, 내셔널시티은행장), 야곱 쉬프(Jacob Schiff, 쿤롭 사)로서 스탠더드오일 씨티은행 그룹(Standard Oil City Bank Group)에 속한다. 그들이 구성하는 자본의 핵심 축이 미국을 통제하고 있다.
-존 무디(John Moody). 무디스인베스터스서비스(Moody’s Investors Service)창립자, 1911년
 
월가의 7인은 미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한 진정한 막후 조정자들이다. 그들 상호간의 협력과 유럽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밀한 도움으로 마침내 미국판 잉글랜드은행이 세워진 것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모건 가
 
모건은행의 모태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조지 피바디 주식회사(George Peabody and Company)다. 조지 피바디는 원래 미국 볼티모어에서 건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이었으나,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1835년 영국 런던으로 진출했다. 

금융업이 유망하다고 판단한 피바디는 그곳에서 일부 상인들과 머천트뱅크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업종은 당시 유행하던 ‘고급 금융’이었다. 고객은 주로 정부나 대기업과 부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제 무역 대출을 제공하고,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며, 대형 상품을 취급했다. 이것이 오늘날 투자은행의 전신이다.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어음 인수 또는 증권 발행을 주요 업무로 하는 은행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Brown Brothers & co.)
알렉산더 브라운이 설립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재벌로서, 미국 자본주의 초기 발달단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피바디는 볼티모어의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의 영국 지사를 통해 영국 금융계에 쉽게 진출했다. 얼마 후 그는 뜻밖에도 네이선 로스차일드 남작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세계 은행가를 좌우하는 네이선과의 만남을 마치 교황이라도 만나는 양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황송해했다.

피바디를 만난 네이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비밀홍보 대리인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에서 재산가로 이름을 떨치면서도 미움과 조롱을 받고 있었다. 런던의 귀족 계급은 네이선을 업신여기면서 그의 초대를 번번이 거절했다. 

비록 로스차일드가 영국에서 세력을 떨친다고는 하나 귀족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네이선이 피바디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겸허함과 인덕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인인 피바디가 앞으로 쓸모가 많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물론 피바디는 네이선의 제의를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홍보에 필요한 모든 지출은 네이선이 부담했다. 피바디의 회사는 순식간에 런던에서 유명한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매년 7월 4일에 피바디가 주최하는 독립 기념 파티는 런던의 귀족들 사이에 이미 큰 행사로 자리 잡았다. 손님들은 그토록 호화롭고 웅장한 파티 비용을 몇 년 전만 해도 무명의 보통 상인이던 피바디가 부담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1854년까지만 해도 조지 피바디는 100만 파운드급 은행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000만 파운드를 벌어들여 미국의 중량급 은행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사실 피바디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책동한 1857년의 경제위기 가운데 미국 철도 채권과 정부 채권에 대규모로 투자했다가 영국의 은행가들이 투매할 때 큰 손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잉글랜드은행이 파산 직전에 있는 그에게 80만 파운드의 신용대출을 긴급 제공해 기적적으로 소생할 수 있었다. 그러더니 그 동안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피바디가 모든 재산을 털어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미국의 국채들을 사들였다. 

1857년의 경제위기는 1837년 당시 10년을 끌던 불황과 달랐다. 미국 경제가 불과 1년 만에 불황의 늪을 빠져나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피바디의 수중에 미국 채권들은 그를 슈퍼급 부호로 빠르게 변신시켜주었다. 이는 네이선이 영국 채권을 사들이던 1815년의 상황과 유사하다. 정확한 내부 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파산의 악몽에서 막 깨어난 피바디가 미국의 채권을 그토록 과감하게 사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피바디는 방대한 사업을 물려줄 후계자 문제로 늘 고심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젊은 주니어스 모건(Junius Morgan)을 영입했다. 피바디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주니어스 모건이 사업을 물려받았으며, 회사 이름도 주니어스 S. 모건 사로 바꾸었다. 

회사는 여전히 런던에서 경영했다. 나중에 주니어스의 아들 J.P. 모건이 회사를 물려받은 후 미국 지사의 이름을 JP모건이라고 지었다. 1869년, J.P. 모건과 드렉셀은 런던에서 로스차일드 가문과 만났다. 모건 가는 조지 피바디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관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1880년, JP모건은 철도공사의 구조조정을 위한 비즈니스 활동에 대량의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891년 2월 5일, 로스차일드 가문과 영국의 다른 은행가들이 모여 비밀 조직인 ‘원탁회의그룹’을 설립했다. 미국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때 앞장선 장본인이 모건 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원탁회의그룹은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 CFR)’로 이름을 바꿨고, 영국의 원탁회의는 ‘왕립국제문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RIA)’로 개명했다. 영, 미 양국 정부의 주요 관리들은 대부분 이 두 협회에서 배출되었다.

1899년, J.P. 모건과 드렉셀은 영국 런던으로 가서 국제 금융재벌들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쪽 수석 대리인으로 선출되었다. 런던회의 결과 뉴욕의 모건, 필라델피아의 드렉셀, 런던의 모건 그렌펠, 파리의 모건아르제앤드컴퍼니, 독일과 미국의 와버그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완전히 연계를 맺게 되었다.

1901년, J.P. 모건이 5억 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시가 10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의 미국 철강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가 세워졌다. J.P. 모건은 당시 세계 초고의 갑부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시전국경제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자기 회사 주식 가운데 9%의 지분만 보유했다고 한다. 명성이 자자한 모건도 알고 보면 무대에 나선 광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석유 왕 록펠러
 
존 록펠러는 미국 역사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가장 냉혹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그의 이름은 자연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는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과 떼어놓을 수 없다.

록펠러가 석유산업에 뛰어든 역사는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1861~1865년)로 거슬러 간다. 1870년에 아메리카 스탠더드오일 회사를 세울 때만 해도 사업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으나, 클리블랜드 내셔널 시티은행의 대출을 받은 이후로 그는 사업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찾은 듯했다. 특히 악의적 경쟁이 판치는 곳에서는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몸담은 석유제련업종은 단기적으로 볼 때 수익이 높았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업체끼리 제살 깎아 먹기 식의 악성 경쟁이 성행했다. 록펠러가 여기서 살아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인정사정 없이 경쟁자를 짓밟아버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선 그의 조종을 받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한 회사를 통해 현금을 주고 낮은 가격에 경쟁사를 사들이는 것이다. 만약 제안을 거절하면 무자비한 가격전으로 보복을 하는데, 그 경쟁은 상대방이 굴복하거나 파산까지 가야 끝이 났다. 이렇게 해도 효과가 없을 경우 록펠러는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즉 경쟁업체의 직원들을 구타하거나 경쟁사 공장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경쟁사가 몇 안 남게 되었다. 이 같은 독점 행위는 동종업계의 분노를 불러왔지만, 뉴욕 은행가들은 그의 회사에 큰 흥미를 느꼈다. 독점을 선호하는 은행가들은 록펠러가 독점을 위해 저지르는 고도의 집행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점점 강해지는 미국을 제압하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차라리 유럽의 국왕 한 명을 제압하는 것이 민선 정부를 통제하는 일보다 훨씬 쉬웠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자 로스차일드 가는 미국을 통제할 계획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금융업에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가 있었지만 공업계에서는 아직 적당한 대리인을 찾지 못하던 차에, 록펠러의 모든 행동은 로스차일드 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금융 쪽으로 대량 수혈을 해준다면 록펠러가 좁은 클리블랜드 지역쯤은 훌쩍 뛰어넘는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금융 전략가인 쿤롭 사의 야곱 쉬프를 록펠러에게 보냈다.

 1875년, 쉬프는 록펠러의 다음 확장 계획을 직접 자문해주었으며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로스파일드 가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를 통해 미국 철도운수업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쉬프는 ‘사우스임프루먼트컴퍼니(south Improvement Company)라는 회사를 차려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에 대해 운반비를 대폭 할인해주었다. 

다른 제련회사들은 일단 운송 원가에서 록펠러의 상대가 안 되었으므로 얼마 안 가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록펠러는 미국 석유산업을 완전히 독점하고, 명실상부한 ‘석유왕’이 되었다.


로스차일드의 금융 전략가 야곱 쉬프

 
로스차일드 가문과 야곱 쉬프 가문의 인연은 17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스차일드는 가족을 이끌고 프랑크푸르트의 한 5층 아파트로 이사해서 쉬프 가족과 몇 년간 함께 거주했는데,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같은 독일 유대계 은행가인 양가는 이미 100년 넘게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865년, 겨우 열여덟 살의 야곱 쉬프는 영국 로스차일드은행에서 얼마 동안 수습행원으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미국에 있는 유럽 은행가 대리인 간의 이익을 조정함으로써 미국의 민간 중앙은행 제도 수립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또 다른 목적은 유럽 은행의 대리인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 양성한 다음 정부나 법원, 은행, 기업, 언론 등 요직에 심어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1875년 1월 1일, 야곱은 쿤롭에 입사하고 회사의 핵심 인물이 된다. 강력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쿤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은행으로 성장했다.


철도 왕 제임스 힐

 
철도 건설은 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인프라사업이다. 거대한 미국의 철도산업은 상당 부분 영국과 유럽의 자본시장에 의존해 발전했다. 유럽에서 발행하고 통제하는 철도 채권이 미국 철도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직접적 수단이었다.
 
1873년, 국제 금융재벌들이 갑작스레 미국에 대한 금융 긴축 작전을 실시함에 따라 미국 채권의 투매 열풍이 불어오자 철도 채권도 그 태풍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79년, 한차례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미국 철도 최대의 채권자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어떤 철도회사라도 망하게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기선으로 운송하는 석탄채굴사업으로 일어난 제임스 힐은 금융재벌의 도움을 받아야만 철도업계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모건은 그의 든든한 금융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모건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그는 1873년의 위기를 겪으며 많은 철도회사가 도산하는 틈을 이용해 다른 회사를 인수, 합병하고 규모를 확장했다.

1893년에 이르러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를 보유하겠다는 제임스 힐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하지만 중서부 철도의 통제권을 손에 넣으려 할 때 강력한 적수를 만났다. 록펠러 재단이 뒤를 봐주는 유니언퍼시픽철도(Union Pacific Railroad)가 기습을 해온 것이다. 

유니언퍼시픽철도의 대표 해리먼(Harriman)은 비밀리에 제임스의 노던퍼시픽철도(Northern Pacific Railroad) 주식을 사들였고, 제임스의 회사가 해리먼에게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해리먼이 4만 주만 더 확보하면 게임 끝이었다. 당장 제임스는 유럽에서 휴가 중이던 모건에게 긴급 구조를 요청했고, 모건은 록펠러의 도전에 대해 즉각 역공에 나섰다. 

일순간 월가는 노던퍼시픽철도의 주식 쟁탈전으로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 한 주당 가격은 1,000달러까지 치솟았다.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면 그 중 한 마리는 다치게 마련이다. 부작용을 염려한 국제 금융재벌들이 중재에 나서면서 양측은 싸움을 덮었고, 최종 결과는 합병이었다. 그들은 지주회사인 노던증권회사(Northern Securities Company)를 공동 설립해 북부의 모든 철도회사를 손아귀에 넣었다. 

지주회사를 설립하던 그날,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key)가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취임했다. 노던증권회사는 신임 대통령 루스벨트의 강한 반대로 1890년 통과된 반독점법 ‘셔먼법’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다. 좌절을 겪은 제임스는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콜로라도에서 텍사스까지의 철도를 사들였다. 1916년에 세상을 떠날 때 제임스 힐의 재산은 5,300만 달러였다.


반독점법

독점에 의해 발생되는 부당한 거래의 제한과 독점 그 자체를 배제 또는 규제하기 위한 법률로, 미국의 셔먼법이 그 시초다.


와버그 형제

 
1902년, 폴과 펠릭스 와버그 형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으로 이민했다. 은행가 출신 집안의 형제는 은행 업무에 훤했는데, 특히 폴은 당시 금융의 최고 전문가라고 할 만했다. 폴의 재주를 높이 산 로스차일드는 유럽전략연맹의 와버그은행으로부터 형제를 빼내 인재가 필요한 미국에 배치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에서 민영 중앙은행을 추진했으나, 100년이 다 되도록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폴이 주요 공략 임무를 계승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폴은 선발대인 야곱 쉬프의 쿤롭사에 들어가 쉬프 처제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동생 펠릭스는 쉬프의 딸과 결혼했다.

루스벨트와 윌슨, 두 대통령을 보좌한 금융 고문 개리슨은 두 형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올드리치의 계획이 전국적인 원성과 반대에 부딪히는 상황에서 폴 와버그는 미연방준비은행 법안을 재구성했다. 이 두 계획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기발한 지혜는 모두 런던에 있는 알프레드 드 로스차일드의 머리에서 나왔다.
 



미연방준비은행 설립의 전초전 : 1907년 금융위기
 
1903년, 폴은 유럽 중앙은행의 ‘앞서가는 경험’을 미국에 소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을 야곱 쉬프에게 전달했다. 이 문건은 곧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오늘날의 씨티은행)의 제임스 스틸먼 행장과 뉴욕 금융계에 전해졌다. 폴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사람들은 마치 정수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미국에 민영 중앙은행을 줄곧 반대하는 정치 세력과 민간 세력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공업계와 중소업주들 사이에서 뉴욕 금융계 인사들의 평판은 아주 형편없었다. 의원들은 은행가들의 민영 중앙은행 설립 제안을 몹쓸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피해 다녔다. 이 같은 정치 분위기에서 은행가에게 유리한 중앙은행 법안을 통과시키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이렇게 불리한 정세를 뒤엎기 위한 거대한 금융위기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구성되었다.
먼저 신문과 언론에 새로운 금융 개념을 홍보하는 글을 대량으로 게재했다. 1907년 1월 6일에는 ‘우리 은행 시스템의 결점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폴의 글이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폴은 미국 중앙은행 제도 설립을 제창하는 선봉에 섰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 쉬프는 뉴욕 상공회의소에 “신용 자원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세우지 않으면 장차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837년, 1857년, 1873년, 1884년, 1893년과 마찬가지로 금융재벌들은 경기가 과열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거품 현상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 또한 시중에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기는 필연적 결과였다. 이 모든 과정은 금융재벌이 어항 속에 물고기를 키우는 것과 같았다. 

금융재벌들은 마치 어항에 물을 붓듯 시중에 돈을 풀어 경제주체에게 대량으로 화폐를 주입했다. 돈을 풀면 각계각층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욕심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서 부를 창출하는데, 어항 속의 물고기가 각종 양분을 열심히 흡수해 점점 살이 오르는 것과 같다. 금융재벌들이 수확의 시기가 왔음을 알고 어항의 물을 빼면, 물고기들은 잡혀 먹히는 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항의 물을 빼고 고기들을 처분하는 시기는 몇 개의 대형 은행들만 알고 있었다. 한 나라가 민영 중앙은행 제도를 설립한 이후로는 은행재벌들이 물을 대고 빼기가 더 수월해지므로 수확도 한층 많아질 것이다. 경제의 발전과 쇠퇴, 재산의 축적과 증발은 모두 은행재벌들이 진행하는 ‘과학적 사육’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모건과 그의 배후에 있는 국제 금융재벌들은 이번 금융위기로 예측되는 성과를 정확하게 계산했다. 첫째,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는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사실’로 증명할 것이다. 둘째, 소규모의 경쟁 금융기업을 도산시켜 합병한다. 특히 자산신탁회사, 즉 투신사는 은행가들의 눈엣가시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군침을 흘려온 중요 기업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다.
당시 잘나가던 투신사들은 은행이 못하는 업무를 많이 다뤘으며 정부의 규제도 느슨했다. 

이런 이유로 투신사들은 사회자금을 지나치게 흡수하고, 리스크가 큰 업종과 증시에 투자했다. 1907년 10월 위기가 터질 때까지 뉴욕의 은행 대출 절반 정도가 고수익을 내는 투신사에 흘러 들어가고, 투신사는 그 돈을 리스크가 큰 증권과 채권에 투자하는 바람에 금융시장에는 극도의 투기 바람이 불었다.

몇 달 전부터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휴식을 취하던 모건은 국제 금융가들의 빈틈없는 계획을 듣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투신사인 니커보커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가 곧 파산하리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은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뉴욕 전체를 휩쓸었고, 돈을 날릴까 걱정하는 투자자들이 인출을 요구하며 몰려드는 바람에 투신사마다 북새통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투신사에 즉시 대출을 상환하라고 독촉했고, 양쪽에서 시달리던 투신사들은 하는 수 없이 증권시장에서 돈을 빌렸다. 그러자 대출 금리는 단숨에 150%까지 치솟았다. 10월 24일, 주식 거래는 거의 중단 상태였다.

이때 모건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뉴욕 증권거래소장이 모건의 사무실로 찾아와 구조를 요청했다. 소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오후 3시 전에 2,500만 달러의 결제를 막지 못하면 최소 50개의 거래 기업이 파산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증권시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후 2시에 모건은 긴급 금융인 회의를 소집했고, 16분 동안 은행가들은 돈을 모았다. 모건이 즉시 증권거래소에 사람을 보내 금리 10%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자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긴급 구조 자금은 바닥이 났고, 금리는 미친 듯 치솟았다. 8개의 은행 및 투신사가 이미 도산했다. 모건은 뉴욕 청산 은행으로 달려가서, 임시 화폐로 어음을 발행해 현금 부족을 해소하라고 요청했다.

11월 2일 토요일, 모건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을 실천에 옮겨 파산의 위기에 몰린 무어&실리(Moore&Schley)사를 구제하기로 했다. 2,500만 달러의 채무 때문에 도산을 눈앞에 둔 이 회사는 테네시석탄 철강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무어&실리가 도산한다면 뉴욕 증시는 완전히 붕괴할 테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모건은 뉴욕 금융계의 거물급 인사들을 자신의 도서관으로 불렀다. 상업은행 대표들은 동쪽 서재에, 투신사 사장들은 서쪽 서재에 있게 했다. 그들은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자신들의 운명에 초조해하며 모건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건은 테네시석탄철강회사가 보유한 테네시 주, 앨라배마 주, 조지아 주의 석탄 및 철강 자원이 장차 자신이 창건한 철강의 거두 U.S.스틸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해주리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반독점법의 제약 때문에 모건은 이 군침 도는 먹이를 삼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위기가 모처럼의 합병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다. 

모건의 조건은 무어&실리와 다른 금융회사들을 살리고자 투신사들이 2,500만 달러를 추렴해 붕괴를 막고, U.S.스틸은 무어&실리로부터 테네시석탄철강회사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극도의 조바심과 파산 압박에 몰려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자고 기진맥진한 투신사의 사장들은 어쩔 수 없이 모건에게 백기를 들고 그 조건을 수락했다.

마침내 테네시석탄철강회사를 손에 넣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건의 앞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독점법을 강력히 추진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11월 3일 일요일 밤, 모건은 워싱턴으로 사람을 급파해서 다음 주 월요일 오전 증시개장 전에 대통령의 허락을 얻으라고 지시했다. 금융위기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평생 모은 저축을 날린 시민들은 연일 분노를 터뜨리는 상황이었다. 극심한 위기를 느낀 루스벨트는 부득이 모건의 힘을 빌려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고, 결국 승인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때가 월요일 증시 개장을 불과 5분 앞둔 시간이었다.

뉴욕 증시의 주가는 이 소식에 다시 급상승했다.모건은 겨우 4,500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테네시석탄철강회사를 인수했다. 무디스의 설립자 존 무디의 평가에 따르면, 이 회사의 잠재적 가치는 최소한 1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모든 금융위기는 오래 전부터 준비된 정확한 각본에 따라 발생하며, 번쩍거리는 은행 빌딩은 하나같이 수많은 파산자의 희생 위에 지어진다.


금본위제에서 법정화폐로 : 은행재벌 세계관의 대전환




19세기 말 이래 국제 금융재벌의 돈에 대한 인식에는 또 한 번의 비약적 전환이 있었다.
기존의 잉글랜드은행 모델은 국채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고 정부의 채권과 은행의 발권을 연동시켜 채무 규모를 점점 확대시킴으로써 은행가들이 거액의 수익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금본위 체제에서 은행가들은 인플레이션을 극도로 반대했다. 어떤 화폐라도 평가절하되면 은행가의 이자 수입에 직접적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구상은 대출업으로 이자를 챙기는 비교적 원시적 방법으로, 재산의 축적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결함이 있었다. 

설사 지급준비금 제도를 사용하더라도 금융재벌들의 날로 커지는 배를 채우기에는 여전히 모자랐다. 특히 황금과 백은이 천천히 증가하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금 총량에 상한선을 책정해놓은 셈이었다.
 
지급준비금 제도

은행 예금의 일정 비율을 지급준비금으로서 중앙은행에 강제적으로 예금시켜 그 비율을 상하로 조절해 통화량을 조정하는 제도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할 무렵, 유럽의 은행재벌들은 이미 더 효과적이고 더 복잡한 법정화폐 체제를 모색하고 있었다. 법정화폐(fiat money)는 황금과 백은이 대출 총량에 상당한 제약을 미치는 국면에서 완전히 탈피해 훨씬 융통성 있고 은밀하게 화폐를 통제할 수 있게 했다. 

화폐 공급을 무한대로 늘려 얻는 수익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대출 이자의 손실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알게 된 은행가들은 갑자기 법정화폐의 가장 열렬한 제창자로 변신했다. 그들은 화폐 유통량을 급증시켜 저축자들로부터 거액의 재산을 빼앗았다. 통화 팽창은 은행이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제 경매하는 방식보다 훨씬 그럴듯했으므로 국민의 저항감을 최소화할 뿐 아니라, 그런 사실을 잘 모르게 할 수도 있었다.

은행재벌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인플레이션 관련 경제학 연구는 순수 수학 게임의 궤도로 진입해갔다. 지폐 발행의 증가에 따른 통화 팽창(currency inflation)의 개념은 오늘날 가격 상승에 따른 통화 팽창(price inflation) 개념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이제 은행재벌의 치부 수단에는 원래의 지급준비금 제도, 화폐와 국채의 연동 외에 또 하나의 강력한 도구인 인플레이션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은행은 황금의 수호자에서 황금의 천적으로 드라마틱한 변신을 한 것이다.

통화 팽창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John Keynes)는 따끔하게 꼬집었다. “정부는 이 방법을 이용해 눈에 띄지 않게 국민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 100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이러한 절도 행위를 발견해내기 어렵다.”

엄밀히 말해 미국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기관은 미연방준비은행이지 정부가 아니다.


1912년의 대선 열풍

 
화요일에 프린스턴대학 총장이 여러분의 주지사로 당선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1912년 3월에 그는 대통령에 연임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랍비 와이즈(Rabbi Isaac Wise)의 뉴저지 연설 중. 1910년
 
훗날 윌슨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참모를 지낸 와이즈는 2년 전에 대통령 대선 결과를 정확하게 예언했다. 심지어 그로부터 6년 후의 대선 결과까지 정확히 예측해냈다. 그에게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은행가들의 치밀한 사전 책략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재벌들의 예상대로 1907년의 금융위기는 미국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국민은 투신사에 분노를 품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월가 금융 세력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은행 파산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했다. 금융 독점을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전국을 휩쓸었다.

프린스턴대학의 우드로 윌슨 총장은 금융 독점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의 프랭크 밴더리프 행장이 한 말을 들어보자, “나는 프린스턴의 우드로 윌슨 총장에게 편지를 써서 만찬회 연설을 부탁했다. 그 연설이 중요한 기회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상원위원 넬슨 올드리치도 그 자리에서 연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친구 윌슨 박사는 뜻밖에도 올드리치 상원의원과 같은 자리에서 연설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당시 여야에 상관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다. 40년 동안 의회에서 활동하면서 36년간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권력이 막강한 상원 금융위원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존 록펠러의 장인으로 월가 금융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08년, 올드리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은행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연방정부와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채권과 철도 채권을 담보로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금융계 입장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위험은 정부와 국민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은행가들이 그 열매만 따 먹겠다는 발상이었다. 월가의 이처럼 교묘한 수법이 놀라울 뿐이다. 이 ‘긴급화폐법’은 5년 후 미연방준비은행법의 기초가 되었고, 올드리치는 명실상부한 월가의 대변인으로 인식되었다.

우드로 윌슨은 1879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버지니아대학에서 법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886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02년 프린스턴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학구열에 불타던 윌슨은 금융 독점에 대해 큰 목소리로 반대해왔다. 당연히 금융계의 대변인인 올드리치를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학술적 열정과 이상주의만으로는 금융업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메울 수 없었다. 윌슨은 월가의 은행가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수법에도 완전 문외한이었다.

은행가들은 윌슨의 단순하면서도 이용하기 쉬운 특징에 주목했다. 게다가 그는 사회가 인정하는 금융 독점 반대 운동가가 아닌가! 이처럼 참신한 이미지의 인물은 그야말로 보기 드문 보배였다. 은행가들은 윌슨에게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그를 이용할 날만을 기다렸다.

마침 뉴욕 내서널시티은행의 클리블랜드 도지 이사가 윌슨의 프린스턴대학 동기였다. 1902년 윌슨이 순조롭게 프린스턴 총장에 임명된 것은 든든한 재력의 도지가 뒤에서 도운 결과였다.

이렇게 조금씩 관계를 다진 다음, 도지는 은행가들의 책략대로 윌슨이 대통령감이라는 소문을 월가에 퍼뜨렸다. 총장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을 갑자기 대통령감이라고 떠받드니, 윌슨이 내심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여기에도 대가는 따랐다. 이때부터 윌슨과 월가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얼마 후 윌슨은 월가 큰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1910년 뉴저지의 주지사로 당선된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윌슨은 여전히 정의감에 불타는 어조로 월가의 금융 독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자신의 자리와 정치적 미래가 완전히 은행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행가들은 윌슨의 비난을 이상할 정도로 용인했으며, 쌍방은 일종의 미묘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묵계를 유지했다.

윌슨의 명성이 날로 높아질 즈음, 은행가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그의 대통령 경선 비용을 모았다. 도지는 뉴욕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윌슨 선거 자금 모금 사무실을 차리고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자신은 1,0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헌금했다. 그 후 은행 직접 송금 방식으로 은행가에서는 많은 정치 자금을 모았는데, 그 중 3분의 2가 월가의 큰손 7인이 내놓은 정치 헌금이었다.

대통령 경선 후보에 이름이 거명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윌슨은 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네.”라고 썼다. 이때부터 윌슨은 완전히 금융재벌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민주당 후보인 윌슨의 어깨에는 민주당의 염원도 실려 있었다. 몇 년간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민주당 측도 권력에 대한 목마름으로 윌슨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윌슨이 넘어야 할 산은 현직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다. 당시 전국적 지명도에서 딸리는 윌슨에 비해 태프트 대통령은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자신 있게 연임에 도전한 태프트가 올드리치 법안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태프트의 전임 대통령인 루스벨트가 갑자기 경선 참가를 선언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선택한 계승자이자 같은 공화당 소속의 태프트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루스벨트는 노던증권회사의 해산으로 명망이 높아졌고, 반독점법 추진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은 태프트의 표를 상당 부분 잠식했다.

사실 이들 세 후보자는 모두 은행재벌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은행재벌들이 가장 통제하기 쉬운 윌슨 쪽으로 암암리에 기울 뿐이었다. 월가의 계획에 따라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윌슨은 가볍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는 1992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로스 페로에게 지지표를 많이 뺏기는 바람에 신예인 빌 클린턴에게 패한 경우와 비슷하다.


B프로젝트

 
금융계 거물들은 지킬 섬에서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빈틈없는 직업적 본능으로 두 가지 계획을 준비했는데, 하나는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양동(陽動)작전을 주도해 반대파의 주의력을 그쪽으로 집중시키는 계획으로 공화당의 지지를 받았다. 또 하나는 B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작전인데, 공격의 핵심은 사실 이쪽에 있었다. B프로젝트가 바로 ‘연방준비은행법’이며, 주요 추진 세력은 민주당이었다.

사실 이들 두 계획은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었다. 
대통령 선거도 이러한 핵심 목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올드리치 상원의원과 월가의 결탁 관계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당시 월가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팽배한 가운데 그가 내세우는 금융 개혁 법안이 부결될 것은 확실했다.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오랜 시간을 보낸 민주당은 그 동안 줄곧 금융 독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여기에 참신한 이미지의 윌신이 가세하니, 모든 것이 민주당이 지지하는 연방준비은행법을 관철할 좋은 기회였다. 1907년의 금융위기로 금융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는 양당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민의에 ‘순응’한다며 은행재벌들이 공화당을 희생시키고 민주당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는지도 모른다.

금융재벌들은 대중을 좀더 미혹하고자 내용이 별반 다를 바 없는 두 방안을 따로 내놓고 서로 공격하게 하는 고단수를 썼다.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제일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는 민주당의 제안이 은행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다고 지적하고, 이는 정부에도 불리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본위제에 어긋나는 법정화폐 정책은 은행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잡지 <네이션(Nation)>은 1913년 10월 23일 이렇게 지적했다. “올드리치 선생이 반대하는 황금 기반이 없는 정부의 법정화폐는 본인이 1908년 제안한 긴급화폐법으로 해결할 일이다. 그는 정부가 사실상 화폐 발행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연방준비위원회가 화폐 발행을 전권으로 장악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올드리치의 제안에 대한 민주당의 비난은 국민의 눈을 뜨게 했다. 그들은 올드리치가 수호하는 것은 월가 금융재벌의 이익과 독점적 지위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제시한 연방준비은행은 이 같은 독점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취지에서 비롯되었으며, 지역이 나뉘고 대통령이 임명하며 의회가 심의하고 은행재벌이 전문가의 의견을 제공하는 상호 제약 및 분권 분립 체제의 완벽한 중앙은행 시스템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 사무에 어두운 윌슨은 순진하게도 이 방안을 통해 월가 금융재벌들의 독점적 금융 구조를 깰 수 있으리라고 굳건히 믿었다.

올드리치와 밴더리프, 그리고 월가의 총력을 기울여 반대한 덕분에 민주당이 내세운 연방준비은행법은 오히려 대중에게 호감을 얻었다. 은행재벌들이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교란 작전은 어찌나 교묘한지 무릎을 칠 정도였다.


금융재벌들의 꿈이 이루어지다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됨과 동시에 B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윌슨이 백악관에 입성한 지 겨우 석 달이 지난 1913년 6월 26일, 버지니아 하원의원인 은행가 카터 글래스(Carter Glass)가 정식으로 B프로젝트를 하원회의에 부쳤다. 이른바 ‘글래스 제안(Glass Bill)’이었다. 그는 중앙은행 같은 자극적인 용어를 피하면서 연방준비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했다. 9월 18일, 글래스 제안은 대부분 하원의원이 제대로 살펴볼 틈도 없이 표결 결과 287대 85로 통과되었다.

상원에 제출된 이 제안은 ‘글래스-오언제안(Glass-Owen Bill)’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원의원 로버트 L. 오언(Robert L. Owen) 역시 은행가였다. 글래스-오언 제안은 상원에서 12월 19일 통과되었다. 이때 두 제안에는 아직 손볼 곳이 40여 군데나 남아 있었는데, 상하 양원에서는 크리스마스 1주일 전까지 중요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이듬해나 돼야 재토론이 가능했으므로, 이 법안에 반대하는 주요 의원들은 대부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워싱턴을 떠나고 없었다.

이때 의회에 임시 사무실을 차리고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던 폴 와버그는 때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날치기 통과를 계획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한 시간마다 의원들이 찾아와서 다음 계획을 논의했다. 12월 20일 토요일 밤의 연석회의에서 의견이 다른 몇몇 부분을 일치시켰다. 

당시 의회에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크리스마스 전에 미연방준비은행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심지어 백악관 측에서도 12월 17일에 이미 초대 연방준비은행 이사의 명단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할 정도였다. 그러나 20일 밤이 되도록 몇 가지 핵심 부분에서는 여전히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12월 22일 월요일에 연방준비은행법을 통과시키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연석회의는 은행가들의 독촉에 일요일인 21일에도 회의를 열기로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휴회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20일 한밤중이 되도록 상하 양원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 중에는 지역은행의 숫자, 황금 준비금의 비율, 국내의 국제 무역 거래 시 화폐 결산, 준비금 수정 제안, 미연방준비은행에서 발행한 화폐가 상업은행의 준비금이 될 수 있는지 여부, 정부 채권의 연방준비은행 화폐 발행 담보물 비율, 인플레이션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가운데 21일 하루를 보낸 이튿날, 22일 월요일 자 <뉴욕 타임스> 1면에는 ‘화페 제안이 오늘 법으로 제정될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의회의 효율을 찬양하는 문구로 가득 차 있었다. “연석회의는 비교도 안 되는 신속한 속도로 양원 제안의 견해차를 좁혔으며, 오늘 새벽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뉴욕 타임스>는 그 시간이 대략 월요일 새벽 1시 30분에서 4시 사이라고 보도했다. 모든 미국인의 하루하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중요한 법안은 이렇게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의원은 수정한 부분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고, 당연히 수정안은 제출할 엄두도 못 냈다. 
 
22일 새벽 4시 30분, 마지막 문건을 인쇄하러 보내다.
* 오전 7시 정각, 원고의 마지막 교정을 마치다.
* 오후 2시, 인쇄가 끝난 문건이 의원들의 탁자 위에 놓이고 오후 4시의 회의 개최를 통지하다.
* 오후 4시, 회의가 시작되다.
* 오후 6시 정각, 마지막 연석회의 보고서를 제출하다. 이때 대부분의 의원은 이미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우고, 회의장에 남은 의원은 몇 명에 불과하다.
* 저녁 7시 30분, 글래스가 20분 정도 연설한 다음 토론으로 들어가다.
* 밤 11시, 표결이 시작되고 298대 60으로 하원에서 통과되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3일, 상원에서 표결한 결과 43대 25(27명 불참)로 ‘연방준비은행법’이 통과되다. 월가를 의식한 윌슨 대통령이 상원에서 연방준비은행을 불과 한 시간 만에 통과시키고 정식으로 법안에 서명하다.
 
그 순간 월가와 런던 금융시티는 환호성에 휩싸였다.
이날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의원은 하원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연방준비은행법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신용을 부여 받았습니다.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한 순간부터 금권이라는 이 보이지 않는 정부는 합법화될 것입니다. 국민은 당장에야 잘 모르겠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국민은 다시 ‘독립선언’을 해야 금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금권은 최종적으로 의회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이 의회를 속이지 않으면, 월가는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국민의 의회를 가졌다면 국민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회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는 바로 화폐 체제 법안인 연방준비은행법입니다. 이 은행법의 통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악랄한 입법 범죄입니다. 양당의 지도자들이 밀실에서 담합해 국민이 정부로부터 이익을 얻을 기회를 앗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은행가들은 이 법안에 호평으로 일관했다. 아메리칸내셔널은행의 올리버 샌즈(Olover Sands)행장은 열정에 넘친 평론을 했다.
 
화페 법안의 통과는 국가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줄 것이며, 이 법안의 운영은 상업 활동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보편적 번영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연방준비은행 탄생의 일등공신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1914년 7월 잡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연방준비은행법이 나오기 전에는 뉴욕의 은행가들이 뉴욕 지역의 자금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 전체의 은행 준비금을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미국 정부와 100년에 걸쳐 벌인 치열한 힘겨루기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미국의 화폐 발행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으로 끝났다. 잉글랜드은행 모델이 미국에서도 성공적으로 복제된 것이다.
 

"한 위대한 공업 국가는 신용 시스템으로 단단히 통제된다. 이 신용 시스템은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이 나라의 발전과 우리의 모든 경제 활동은 완전히 소수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가장 악랄한 통치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게는 더 이상 자유로운 발언권이 없으며, 죄를 다스릴 사법권도 없다. 이제 다수 의견으로 선거하는 정부가 아니라 극소수의 지배권을 가진 자의 강압으로 움직이는 힘없는 정부다.

이 나라의 많은 상공업계 인사는 하나같이 모종의 대상을 두려워한다. 보이지 않는 이 권력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은밀하며, 얼마나 무소불위하고, 얼마나 상호 결탁이 잘되어 있으며,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한지 사람들은 감히 이 권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못한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 28대 대통령
 
아래출처: 오마이뉴스

'국가'는 양 날의 검입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이 서슬이 퍼런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거짓말'이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기만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혼란의 시대에 국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말>

 

 

 

[거짓말] 미 연방준비은행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중앙은행이다

 

세계 최강 미국의 중앙은행인 우리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은 1913년에 설립됐습니다. 미국 내 상업은행의 준비금을 관리하고 상업은행들에 대부를 공여하며 미국화폐인 달러를 발행하는 발권은행입니다. 미국 달러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세계화폐입니다.

 

우리가 찍어내는 돈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가 맡은 임무가 막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공기관으로서 철저하게 공익을 우선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경기가 과열됐을 때는 이자율을 높여 경기를 진정시키고 경기가 침체됐을 때는 이자율을 낮춰 경기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앞으로도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의 안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진실] 미 연방준비은행은 민간기관... 국민 상대로 '이자놀음'

 

말도 안 된다고 야유를 보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대한민국의 화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은 이제부터 민간기관이다. 이를테면 국민은행, 삼성생명 같은 거대 금융기관들이 한국은행의 대주주가 됐다.

 

정부가 이런저런 이유로 화폐를 필요로 할 때 국민은행, 삼성생명 같은 민간 기업이 대주주인 한국은행에 이자를 주고 돈을 찍어야 한다. 예를 들어 1억 원의 화폐를 찍었으면 한국은행에 이자로 1년에 100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이러한 이자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의 세금으로 전가된다.

 

무슨 소설 쓰냐고 웃어넘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얘기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것도 미국이라는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FRB라는 약자로 잘 알려진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이 바로 이 소설 같은 현실의 주인공이다.

 

오랜 기간 연방준비은행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연방준비은행 측도 밝히기를 꺼렸다. 그런데 유스터스 멀린스가 쓴 책 <미연방준비은행의 비밀>에는 저자가 오랜 기간 연구 끝에 밝혀낸 연방준비은행의 지분 구성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쑹홍빙의 책 <화폐전쟁>에서는 유스터스 멀린스의 연구 결과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연방준비은행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곳은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이다. 이 은행이 1914년 5월 19일 통화감사원에 보고한 문건에 적혀 있는 주식 지분 총 발행 수량은 20만3053주로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록펠러와 쿤롭 사의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이 3만 주로 가장 많은 지분 보유.

J. P. 모건의 퍼스트내셔널은행이 1만5000주 보유.

 

1955년 이들 두 은행의 합병으로 시티은행이 탄생함으로써 이들이 소유한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의 지분이 전체의 거의 4분의 1에 달하게 되고, 그 후로 사실상 연방준비은행의 총재 후보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의 임명 절차 청문회는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폴 와버그의 뉴욕내셔널상업은행이 2만1000주 보유.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사로 있는 하노버은행이 1만200주 보유.

체이스은행이 6000주 보유.

케미컬은행이 6000주 보유.

 

이상 6개 은행이 40%의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 주식을 보유했다. 1983년 이들의 지분은 53%로 늘어났다. 이들 각자의 지분은 조정을 거쳐 시티은행 15%, 체이스맨허튼 14%, 모건신탁 9%, 하노버 7%, 케미컬 8%로 확정되었다.

 

한 나라의 화폐를 민간기관에서 찍는다니...

 

 

일국의 화폐를 찍어내는 연방준비은행이 어이없게도 이런 식으로 민간은행들의 통제하에 있게 된 것은 사실 연방준비은행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연방준비은행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논의된 장소는 금융자본가 J. P. 모건이 소유한 지킬 섬이었다. 1910년 11월의 어느 날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넬슨 올드리치 : 상원의원. 국가화폐위원회 의장. 넬슨 록펠러의 외조부.

A. 피아트 앤드루 : 미국 재무부 차관보.

프랭크 밴더리프 :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장.

헨리 P. 데이비슨 : JP모건 사 사장.

찰스 D. 노턴 : 뉴욕 퍼스트내셔널은행장.

벤저민 스트롱 :  J. P. 모건의 오른팔.

폴 와버그 : 쿤롭 사 사장,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과 프랑스 대리인. 연방준비은행의 총 설계사. 연방준비은행의 1대 이사.

 

이들은 지킬 섬에 모여서 '연방준비은행법'의 초안을 짜고 있었다. 당시 이 비밀 회동에 대해 참가자인 내셔널시티은행장 밴더리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최대한 조심스럽게 기차역으로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곳에는 올드리치 상원의원의 개인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조건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 특별 그룹이 금융 법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드러나면 그 법안은 의회를 통과할 기회를 도저히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음험한(?) 비밀 모임에서 나온 연방준비은행법은 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철저하게 금융자본가의 이익에 맞춰진 법이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연방준비은행이 어떤 방식으로 달러를 발행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국민에게는 피해가 가고 금융자본가의 배만 불려주는지를 들여다보자.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급준비금' 제도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은행이 보유한 저축액의 10% 정도만 은행에 남겨놓아도 되는 것이 지급준비금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은행에 저축한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한꺼번에 돈을 찾아가지 않는다는 경험적인 사실을 기초로 10% 정도만을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하고 나머지 돈은 대출을 해서 이자 수익을 얻는다.

 

그런데 지급준비금 제도에 대해서 단순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컨대 은행에 누군가가 1억 원을 예금했다면 은행은 지급준비금으로 1000만 원을 보유하고 나머지 9000만 원을 대출 용도로 쓴다는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은행이 1000만 원을 보유하고 9000만 원을 누군가에게 대출해줄 때 해당 대출자의 은행 통장에 넣어주는데, 대출자가 이 돈을 바로 찾아서 쓰지 않는 이상 이 돈 역시 지급준비금 10%를 제외하고 대출이 가능하다. 그래서 대출금이자 저축인 9000만 원의 10%인 900만원을 지불준비금으로 남기고 나머지 8100만 원을 대출용으로 쓸 수 있다.

 

이런 식의 대출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사실상 1억 원의 예금을 지급준비금으로 그대로 남기고 저축을 그 10배인 10억 원까지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 은행은 기존 저축액 1억 원뿐만 아니라 이 '가공의' 돈 9억 원에 대해서도 꼬박꼬박 이자를 챙긴다.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 아니 '돈 만들어 돈 먹기'라 할 수 있는 기막힌 장사다.

 

국민 세금으로 이자 내고 화폐를 '빌려오는' 미국 정부

 

 

 

다시 연방준비은행 얘기로 돌아와보자.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미국 정부에는 화폐 발행권이 없다. 단지 채무 발행권이 있을 뿐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돈을 찍어낼 권리는 없고 빚 문서, 즉 채권을 발행할 권리만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정부의 국채로 연방준비은행에 담보를 제공하고 연방준비은행 및 상업은행 시스템을 통해야만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 달러는 근본이 국채, 즉 국가의 빚인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국민이 미래에 낼 세금을 사실상 민간은행이 통제하는 연방준비은행에 담보로 잡혀서 돈을 꾸어오는 격이다. 당연히 담보로 잡힌 채권에 대해 꼬박꼬박 지급하는 이자도 국민의 세금으로 낸다.

 

연방준비은행에서 빚을 내 화폐를 얻은 정부는 이 돈을 여러 용도로 사용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돈은 여러 경로를 거쳐 다시 은행으로 흘러들어가고 은행들은 그 돈을 종자로 '지급준비금' 제도를 이용해 가공의 돈을 만들어 더 많은 이자 장사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미국 금융자본가들은 연방준비은행을 통해 국민들의 미래의 소득도 저당 잡아 자신들의 이자 장사 종잣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정부가 자신의 돈을 찍는데 민간기관에 이자를 내면서 빌려야 한단 말인가?

 

'연방준비은행법'은 이런 기막힌 상황을 합법화시켜주는 법이다. 기막힌 법이니만큼 의회에서 통과되고 나서 찰스 린드버그 의원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연방준비은행법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신용을 부여받았습니다.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한 순간부터 금권이라는 이 보이지 않는 정부는 합법화될 것입니다. 국민은 당장에야 잘 모르겠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국민은 다시 '독립선언'을 해야 금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금권은 최종적으로 의회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이 의회를 속이지 않으면, 월가는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국민의 의회를 가졌다면 국민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회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는 바로 화폐 체제 법안인 연방준비은행법입니다. 양당의 지도자들이 밀실에서 담합해 국민이 정부로부터 이익을 얻을 기회를 앗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은행가들은 이 법안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아메리칸내셔널은행의 올리버 샌즈 행장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화폐 법안의 통과는 국가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줄 것이며, 이 법안의 운영은 상업 활동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보편적 번영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연방준비은행 탄생의 일등공신인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1914년 7월 잡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방준비은행법이 나오기 전에는 뉴욕의 은행가들이 뉴욕 지역의 자금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 전체의 은행 준비금을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

 

화폐 발행권조차 금융 자본가 손에... "월가를 점령하라"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민간은행의 금융 자본가들이 국가의 화폐 발행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니.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2008년 미국 주택시장 붕괴와 투기적인 금융상품거래로 일어난 세계대공황의 늪에서 전 세계가 허우적거리고 있다. 과연 연방준비은행은 뭘 하고 있을까? 그들은 소위 양적 완화라는 이름으로, 위기에 빠진 은행에 대규모의 달러를 무차별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위기 대응 방식은 딱 거기까지다. 세계대공황으로 수많은 미국 국민들이 집을 잃고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가정이 파탄 났지만 은행들에 한없이 자애로운 연방준비은행의 손길은 국민들에게 미치지 않는다.

 

이에 분노한 미국 국민들은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전례 없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시위대에서 민간기관인 연방준비은행을 국유화하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더 많은 미국 국민들이 국가의 화폐 발행권조차 사익을 위해 사용하는 금융 자본가들에게 'NO(노)'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국가의 거짓말>은 이번 10회 기사를 끝으로 마감합니다. 3월 초에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연재 기사 외에 다양하고 충격적인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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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기자(reltih)


모든 부를 거머쥔 주니어스 모건의 아들 jp모건...

jp모건이 사망시에 jp모건의 지분율은 9%였다.. 그외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아래사진놈의 조상임...

 


출처 : 프리메이슨 연구모임(프.연.모)
글쓴이 : 정직이최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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