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일본사는 곧 매춘사이다

춘종 2014. 11. 24. 10:02

일본사는 곧 매춘사 이다 (1)

Lawrence H. Summers(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이 지난 1일, 한 공식석상에서 연설 중 "1970년(70년대) 서울엔 미성년 창녀들(child prostitutes)이 100 만에 달했다. 오늘날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경제성장이 가져다 준 굉장한 기회 때문"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인터넷 dkbnews.com(도깨비뉴스)이 9일 보도했다.
우리나라 문제가 언급된 것은, 그가 한창 세계화로 인해 달라진 인간생활에 대해 역설하고 있던 중이었다
(70년대 서울 소녀는 모두 창녀였다, 2004-07-09, 한국일보).

日本을 韓國으로 바꾼 것이다. 日本의 賣春史는 헤이안(平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戰後 日本 에서는 賣春이 國策 이었다. 후지메 유끼(藤目ゆき)의 ‘帝國主義와 性暴力’에도 戰後 賣春 실상이 소개되어 있다. 1945년 8월 26일자 日本의 主要新聞에는 駐屯軍을 위한 慰安婦 참가를 독려하는 광고가 일제히 떴다.

광고주는 RAA였다. 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의 약자로 오락 및 위락 협회 즉 日本女子를 메군(米軍)의 오락과 위락으로 제공하는 단체라는 의미이다. RAA 간부들은 皇宮 앞에서 선서식을 갖고 “新日本 재건과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킬 초석 사업임을 자각,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진다”고 선언하고 ‘천황폐하 만세’ 삼창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킨다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未婚, 旣婚을 불문하고 모든 일본여자들이 賣春에 발벗고 아니 옷벗고 나섰다.

서머스(Lawrence H. Summers)의 경력에 비추어볼 때, 日本의 賣春史와 戰後 賣春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저 발언은 의도적으로 日本을 韓國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서머스는 문제가 커지자 “문제의 발언은 통계를 잘못 기억한 탓으로 한 세대가 바뀌면서 미성년 매춘이 빠르게 줄었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1970 년 한국에는 未成年 賣春이 없었다. 1990 년대 日本에서 원조교제가 수입 되면서 한국에서 미성년 매춘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미성년 매춘은 번창일로에 있지, 세대가 바뀌면서 줄어 들지도 않았다.

일본은 난잡한 성 개방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나라이다. 일본이 만든 상품 중에서도 가장 추잡하고 성공한 상품이 성(性)이다. 이런 자신들의 더러운 반인륜적인 행동을 타당화하기 위해 ‘색을 밝힌다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적인 욕구다’라고 애써 변명한다.



日本史는 곧 賣春史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모든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도 그것만은 자신들 스스로 개발, 발전시킨 것이다. 일본의 매춘사는 中國倭가 이주 하면서 부터 시작됐다.

2차 대전 당시 日本은 조선인, 중국인, 기타 국가들의 소녀들을 종군 위안부로 강제 연행 하면서 자국의 여자 수십만은 本土의 賣春婦로 만들었다. 이것은 2차 대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책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일본사는 곧 매춘사 이다 (2)

일본이 메이지(明治) 때에 와서야 겨우 공개적인 성 문화(기모노섹스, 혼욕, 요바이)를 근절 시키려고 한 것은, ‘우리나라의 유구한 전통을 흉보는 것은 高麗, 朝鮮만은 아니구나. 세계가 다 우리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나’하는 생각에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남 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한다는 서양의 성관습 조차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을까. 이 시기 일본은 서양의 모든 것을 광적으로 흉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외국에 수출한 일본의 성문화가 인류를 타락의 극치로 내몰고 있다.

메이지 때의 일본이 얼마나 기를 쓰고 서양을 모방 하려고 했는지 알려주는 얘기가 라이프 2 차 대전에 나온다.

조정의 신하들의 복장도 양복을 모방하려고 애썼다. 그런 모습이 당시 일본을 방문한 잉글랜드 여자에게는 신기한 웃음거리로 비쳤다. “거의 모든 양복이 기성복이라 그들의 몸에는 너무나 컸다. 바지를 헐렁한 부츠 안으로 한껏 쑤셔 넣었으며 가장자리에 주름을 단 모자는 귀까지 내려 왔거나 머리 뒤통수에 간신히 얹혀 있었다.”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에는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인들은 서양 문물을 흉내내는 데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서양문물만 미친 듯이 모방했는 줄 아는가? 우리나라가 應神에게 옷을 하사한 그 순간부터 우리민족의 문화를 그렇게 광적으로 모방해왔다.

모방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대대로 百濟寺, 百濟宮을 짓고 살고, 百濟寺는 큰 곳만 5 곳을 짓는 것. 역대 倭王들 가운데 처음으로 왕도에 백제궁이라는 왕궁을 지은 것은 비다쓰(敏達)이었다. 34 대 죠메이(舒明)는 ‘百濟川’이 흐르는 ‘백제'땅에다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짓고 百濟大宮에서 살았다. 죠메이는 죽어서도 ‘백제대빈(百濟大殯)’에 가매장됐다. 왜곡하기 일쑤인 日本書紀에 남겨놓은 기록이다.

조선통신사로 부터 온갖 것을 모방[그래도 천문학은 어려웠던지 배우지 못하고, 나중에 서양인 으로부터 배웠다. 천문학은 왕보손(王保孫), 관륵(觀勒), 고려 천문관, 이씨조선 천문관에 이어 다섯 번 째서야 간신히 배웠다]한 결과, 드디어 20 세기 초반에는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노기(乃木希典 : 메이지가 죽었을 때 따라서 자살했다)는 일본정신을 나타내는 서도, 분재기술, 지성을 고루 갖춘 군인의 대표였다(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이제 일본사에 있어서 매춘의 실태를 살펴보자.

일본 에서는 매춘의 범람이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일본은 오랫동안 공창(公娼)제도를 유지해온 나라이다. 공창을 사창(私娼), 즉 밀매춘과 구별하는 기준은 운영 주체가 아니라 당국의 인허가 여부이다.
일본 역사상 유카쿠(遊廓)의 설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절인 1585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집권이후 에도(江戶 : 현재의 東京)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유카쿠의 이용은 비용이 비쌌던 데다 나름대로의 격식이 강조되는 바람에 서민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단속의 틈을 비집고 밀매춘이 성행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위를 잃어갔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숙박업소나 사창가에도 면허를 내주어 유카쿠의 확대를 꾀해 1924 년 일본 전국의 유카쿠는 545 개로 불어났고 1 만 1,200 개 업소에서 5 만 2,200 명의 공창이 일할 정도로 번창했다.
유카쿠를 없애자는 ‘하이쇼(廢娼)'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46 년 1 월 공창 폐지령이 발동될 때까지 유카쿠는 살아 남았다. 군대의 존재가 주된 방패막이였다.
일본군의 유카쿠 옹호는 전국시대 무장이 몸종을 겸한 유녀를 진중에 두었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2 차대전 당시 가는 곳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고 갖은 방법으로 위안부를 동원했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8 세기 중반의 시가집 ‘만요슈(万葉集)'에는 노래와 춤으로 남자를 유혹해 몸을 파는 ‘우카레메(遊行女婦)'가 등장한다.
10~12 세기에는 ‘아소비메(遊女)'란 고유어가 나타났다. 16 세기에는 '조로(女郞)'라는 호칭도 쓰였다. 유녀가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 것도 남성 우위 사회의 상징적 단면이다
(재미있는 일본⑮, 후조쿠(風俗)①, ②, 한국i닷컴) ( http://www.goodlove.pe.kr/bbs/zboard.php?id=japa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desc&no=90 참조).


1945 년 8 월 26 일 일본의 주요 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렸다.전후 처리를 위한 국가 긴급시설의 하나로서 주둔군 위안의 대사업에 참가한다. 신일본 여성의 솔선참가를 바란다. 여자 종업원 모집. 나이 18~25 세. 숙식·의복 제공.광고주는 긴자(銀座)에 본부를 둔 RAA라는 단체였다.
화류계 대표들이 만든 ‘특수 위안부 설비협회’의 영어 약자라는 사실은 나중 에서야 드러났다. 자본금 1 억엔 가운데 5,500 만엔은 대장성(大藏省)의 보증으로 당시 강교(勸業)은행이 융자해 주었다. 앞서 8 월 18 일 경찰청은 곧 진주할 메군 전용의 위안소 설치 문제를 화류계 대표들과 협의했다.
8 월 27 일 도쿄 오타(大田)구 오모리(大森)의 요정 '고마치엔(小町園)'이 1 호 메군 전용 위안소로 지정 되었다. 이튿날 RAA 간부들은 황궁 앞에서 선서식을 갖고
신일본 재건과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킬 초석 사업임을 자각,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진다고 선언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수백 년 전통의 유곽에 이어 새로운 국책 매춘이 시작되는 순간 이었다.
국책 매춘의 양상은 도쿄도(東京都)가 전후 처음으로 제정한 조례 성병예방 규칙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합군사령부(GHQ)의 요청에 따라 1945 년 10 월에 만들어진 이 규칙은 점령군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의 청결과 정기 검진 의무가 골자였다.
RAA의 위안소는 메군 진주와 함께 전국적으로 45 개로 늘어 났으며 위안부는 4,000 여명에 달했다. 메군을 상대하는 사창(私娼) '요팡(洋パン)'은 순식간에 40 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GHQ는 1 월 24 일 공창제도의 폐지를 명령하자, 일본 정부는 2 월 2 일 전국 경찰에 ‘공창제도에 관한 지시’를 내렸고 2 월 20 일 공창제도를 정식으로 폐지했다. 이때 인신매매 금지 규칙이 제정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때 까지도 유곽의 공창 등은 인신매매를 통해 공급됐다. 피폐한 탄광 지대나 흉작에 휩쓸린 농촌의 딸들이 알선꾼을 통해 1 만~2 만 엔에 업소에 팔렸다.
공창제도가 폐지 됐다고는 하지만
수백 년간 이어진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유곽의 업소는 ‘특수음식점’으로, 창부는 ‘여급’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경찰 당국은 전통 유곽 지대를 지도 위에 붉은 선으로 표시해 두고 이 지역 에서의 매춘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적 자유연애의 결과’로 해석 하면서 묵인했다. ‘적선(赤線)지대’가 사실상 공인된 매춘지역을 뜻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패전 후의 경제적 피폐로 곳곳에 늘어 선 거리의 여자를 제대로 단속 하기란 처음부터 무리였다. 온갖 수법의 사창이 거리에 넘쳤다.
(재미있는 일본(17), 후조쿠(風俗)③, 한국i닷컴)

일본 정부는 항복하여 불과 3 일째인 8 월 18 일, 점령군용으로 성적 위안시설을 준비하여 그 영업을 적극적으로 지도하며 빠르고 충실한 설비를 도모 하도록 전국에 지시, 이어서 유곽과 기생집, 요정, 카페, 또 산업전사 위안소의 업자들에게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를 결성시켜 1 억엔의 예산을 투입 관계관청을 동원 하였다. 최초로 개점한 RAA의 위안소 에서는 일본군의 병참 사령부에서 고안했던 종군 위안소 규칙을 전부 참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점령 2, 3 개월 사이에 매춘 전문점이나 캬바레, 댄스홀, 맥주홀 등 점령군에게 여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 전국 각지에서 지방청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전후 처리의 국가적 시설의 일단으로서 진주군 위안의 대업에 참가하는 신일본여성의 솔선협력을 구함」이라 하여 숙소·피복·식량지급을 약속하는 RAA의 공고에 패전 직후 아사상태에 있던 많은 여성이 모여들어, 최성기에는 7 만명, 이듬해 봄의 폐쇄시에는 5 만 5 천명의 여성이 일하고 있었다. 메군은 이와 같이 일본측 으로부터 제공받은 성적 「위안」을 향유 하면서, 댄서나 맥주홀 종업원까지 포함하여 실제로 메군병사와 관계를 갖든 갖지 않든 간에 RAA의 여자들에게 강제적인 성병검진을 시켰다.

◀ 상의만 입었던 왜노들의 현재의 유습

 

 

 

 

 

 

 

 

 

 

 

 

 

 

 

 

 

 

 

 

 


 


▲ 일본열도



 
출처: http://cafe.daum.net/osmdg24/HsFD/145?docid=tMem|HsFD|145|20061222041316&q=%C7%D1%B1%B9%BF%A9%C0%DA%20%C3%A2%B3%E0%20%BC%AD%B8%D3%BD%BA

 

 

 

 

//
출처 : 동양학토론
글쓴이 : 황금시대 원글보기
메모 :